최단 기간, 최대 민간인 숨진 민족상잔의 전쟁
상태바
최단 기간, 최대 민간인 숨진 민족상잔의 전쟁
  • 충북인뉴스
  • 승인 2012.07.04 11: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진실화해위원회, 충북 보도연맹원 희생자 확인 820명, 추정 1800명
단양에서 영동까지 군경 학살현장 확인…청원 분터골 300여명 사망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운동 10년사 <상>

세계 전쟁사에 가장 비극적인 민족전쟁으로 기록될 6·25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2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무고하게 숨진 민간인들의 피해사례가 공개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년전이다. 일부 언론보도를 통해 국민보도연맹원 집단학살에 대한 진실이 알려졌고, 1999년 AP통신이 미군의 영동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을 폭로하면서 국제적 이슈로 떠올랐다.

역에서는 지난 2002년 진보적 시민단체들의 참여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충북대책위원회’(이하 충북대책위)가 발족됐다. 충북대책위는 2008년까지 3차례에 걸쳐 실태보고서를 발간했고 괴산군 사리면 유족회를 시작으로 9개 지역 유족회를 결성하는데 앞장섰다.

올해 충북대책위 발족 10주년을 맞아 박만순 운영위원장(사진)의 특별기고로 그간의 활동상을 정리해 본다.

왜 쏘았지(총) 왜 찔렀지(칼)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 망월동에 부릅뜬 눈 수천에 핏발 서려있네~” 1980년 광주항쟁을 다룬 ‘5월의 노래’ 가사 첫머리다. 이 노래를 생각하면 할수록 1950년 한국전쟁의 상황이 떠오르는 이유는 왜 일까?

전쟁 전 좌익활동을 한 사람들, 전쟁 초기 보도연맹원들과 형무소에 수감된 정치범, 그리고 UN군 수복 후 부역혐의자들은 위 노래가사와 똑같은 운명에 처해졌다. 청주경찰서 무덕전(옛 강당) 등 충북도내 경찰서와 지서에 구금되었던 이들은 군경(軍警)에 의해 트럭에 태워졌다.

트럭은 청원군 분터골과 옥녀봉, 충주 싸리고개, 진천 조리방죽, 영동 어서실 등지로 갔고, 돌아올 때는 운전수와 동승한 경찰만이 있었다. 핏발을 세운 수천의 부릅뜬 눈이 반백년을 도내 마을 곳곳에 서려있었다. 수천 명의 사연은 한국전쟁 전부터 시작된다.

▲ 청주 인근에서 가장 많은 보도연맹원 희생자가 묻힌 청원 남이면 분터골 유해발굴 현장.

보도연맹, 좌익 예방학살 희생양

1949년 8월 말 청원군 미원면 운용리 일대 주민 약 30명이 경찰에 의해 낭성면 추정리에서 처형됐다. 이들은 괴산과 미원 일대에서 활동하는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운용리 노병창(여)은 8월 어느 날 한밤중에 아버지와 마을의 여러 여성들과 함께 미원지서에 끌려갔다. 노병창의 아버지가 좌익 활동가 신영우와 절친한 친구이고, 빨치산과 관련되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은 것이다. 다음날 아침 여자들은 풀려났지만, 남자들은 모두 추정고개로 끌려가 처형됐다.

이승만 정권은 집권 초기부터 극단적 반공정책을 취하면서, 자신의 사상과 정책을 달리하는 집단과 개인을 빨갱이로 몰아붙였다.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지 않고 정권에 대한 충성만을 강요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국가보안법 제정과 국민보도연맹 창설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1949년 4월 20일 국민보도연맹을 창설했다.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의 설립목적은 좌익 세력을 ‘보호’한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그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데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앙정부의 지시를 받은 충북도경은 도내 각 경찰서에 보도연맹원을 잡아들일 것을 지시한다. 경찰은 보도연맹원들에게 “전쟁이 나서 먼저 피난시켜 줄테니 쌀 두되씩을 갖고 모여”라며 소집을 재촉했다. 하지만 보도연맹원들은 안전한 피난처가 아닌 죽음의 구렁텅이로 끌려가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보도연맹원들이 북한군을 도와 대한민국에 총부리를 겨눌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막연한 추측에 근거한 일종의 예방학살로 명백한 전쟁범죄 행위였다. 죽음의 구렁텅이로 끌려가는 줄 몰랐던 보도연맹원들은 순순히 소집에 응했다.

충북의 남부권인 옥천과 영동은 대략 7월 초에서 18일까지였고 나머지 지역은 7월 5일에서 10일 사이였다. 소집된 보도연맹원들은 경찰서나 지서 유치장, 초등학교 강당, 양곡 창고 등지에 구금되었다. 감금은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5~6일까지 이루어졌다. 학살 장소로 이동할 때는 2인에서 5인씩 같이 묶었는데, 광목천, 노끈, 삐삐선(군용 야전 전화선), 철사줄, 새끼끈 등을 사용했다.

학살은 대부분 야산에서 이루어졌는데, 청원군 오창 창고의 경우처럼 면내 한복판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보도연맹원 소집과 학살의 최고 지도부는 특무대(CIC)였다. 보도연맹원 처형 집행은 헌병대의 주관 하에 도내 각 경찰서 사찰과와 지원된 보병 군인에 의해 이루어졌다.

▲ 북한군은 50년 9월 퇴각 직전 청주형무소(위)에 구금된 군경 가족, 우익 인사 500여 명을 인접한 당산(왼쪽), 무심천 다리밑에서 집단학살했다.

충북의 중·북부지역(충주·음성·진천·청원군 북부)은 6사단 7연대와 19연대, 2사단 16연대 등의 헌병대가 집행책임자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에 인근 전투부대 병력, 도경, 경찰서 사찰과, 통신과, 보도연맹 간부 등이 동원되었다. 소집된 보도연맹원 중 최소 4,000명 이상이 충북도내 40여 개의 장소에서 학살되었다. 청주시와 청원군에서는 각각 1천명과 550여 명이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청주 지역에서 현재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1개 동에서 최소 30명에서 60명가량이 학살되었다.

전쟁 직후에 실시한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청주시 내덕동의 경우는 153명이 학살되었다. 단일 읍·면으로 가장 많이 학살된 지역은 청원군 오창면으로 300명 가까이 학살되었다. 옥천군에서는 500명이 학살된 것으로 보이고, 영동군에서는 401개 자연마을에서 429명 이상의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이와 같이 충북도내에서 각 마을별로 희생자가 없는 마을이 거의 없을 정도로 보도연맹원 학살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한 도내 희생자 수와 충북대책위원회가 조사한 희생자 수를 비교하면 표와 같다.


청주형무소 정치범 800여명 사상

한국전쟁은 보도연맹원 학살에 이어 정치범 학살까지 불러왔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청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정치범 800여 명이 후퇴하는 한국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이들은 1950년 7월 2일부터 7월 5일까지 충북 청원군 남일면 고은리 분터골, 화당리 화당다리, 낭성면 도장골, 가덕면 피반령 일대에서 학살당했다.

전쟁 당시 청주형무소는 청주시 탑동 238번지에 위치해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청주형무소에 비상소집령이 내려졌다. 7월 2일 오전 10시경에는 헌병대가 트럭에 포승줄을 가득 싣고 왔다. 헌병대는 잔여 형기가 긴 사람부터 피난시켜 준다며, 포승줄로 묶은 뒤 차에 탑승시켰다. 이 일은 5일까지 계속되었다.

청원군 낭성면 도장골 에서는 수의를 입고 용수를 쓴 재소자 100여명이 골짜기 안으로 끌려가 학살되었다. 청원군 남일면 화당다리와 쌍수리에서 각각 100명씩 총 200명이 총살되었다. 그리고 가덕면 피반령 고개에서도 200명이 총살되었다.

청원군 남일면 분터골은 청주형무소 교도관들이 직접 경비를 섰던 곳으로, 교도관들은 재소자들의 손을 일일이 묶은 뒤, 트럭에 실어 분터골로 끌고 가 300여명을 학살했다.


피난길에 쏟아진 미군의 폭격과 기총소사
영동 노근리·단양 곡계굴, 미군의 대표적 양민학살 사건

1999년 AP통신의 보도로 노근리 사건은 전 세계에 알려졌고, 미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사건의 대명사로 불려졌다. 노근리 사건에 힘입어 충북 도내를 포함한 전국 160여 곳에서 미군사건에 대한 진실의 문을 두드렸다.

▲ 미군 양민학살 사건으로 150명의 희생자가 확인된 영동 노근리 쌍굴다리 현장.

미군에 의한 피해는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첫째, 개전 초기~수복기의 폭격과 포격에 의한 피해. 둘째, 1?4후퇴 시기의 폭격에 의한 피해이다. 첫째 유형은 영동군의 피해가 가장 심했고, 둘째 유형은 주로 단양군 일대에서 발생했다.

첫째, 개전 초기~수복기의 주민 피해는 영동군 노근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노근리 사건은 1950년 7월 25일부터 29일까지 영동군 영동읍 하가리와 황간면 노근리 인근 주민들과 피난민들이 집단 학살당한 사건이다. 공식적으로 확인된 피해자는 사망 150명, 행방불명 13명, 후유장애 55명이다.

영동군에서는 노근리 사건 이외에도 7월 27일 양강면 지촌리에서 골짜기로 피난을 갔던 주민 7명이 사살되었고, 같은 날 양강면 구강리에서 주민 20여 명이 미군의 폭격과 기총소사로 사망했다. 7월 29일 미군은 매곡면 장척리에 들어 와 소개(疏開)에 불응했다는 이유로 마을 주민 약 10여명을 사살했다.

 피해자 대부분은 피난을 갈 수 없는 상태의 노약자나 장애인들이었다. 9월 3일에는 영동역 일대와 매천리 폭격으로 매천리 주민 70여명이 사망했다. 9월 8일에는 청원군 현도면 하석리에서 피난길에 오른 주민들이 배를 타고 가다 폭격을 맞아 100여명이 죽었다. 10월 5일에는 옥천군 청산면 인정리 등지의 주민 70여 명이 경찰의 부역에 동원되었다. 국군의 식사 준비를 위해 장작을 운반하는 일이었다. 이들이 지게를 지고 노루목재를 넘을 때 미군 폭격기 4대의 폭격과 기총소사가 있었고, 이로 인해 40여 명이 사망했다.
둘째, 1?4후퇴 시기의 주민피해는 단양군에 집중되었다.

1951년 1월 10일 단양군 단양읍 노동리와 마조리에는 탱크의 무차별 공격과 비행기 기총소사가 이루어지며 한바탕 난리가 났다. 전날 소백산에 자리 잡고 있던 인민군 패잔병들이 마을로 내려와 총을 들이대며 음식과 잠자리를 요구한 일이 있은 지 하루 만에 발생한 일이었다. 1월 10일 새벽 미군의 포격을 시작으로 미지상군은 노동리와 마조리에 진군했다.

미군은 전날 주민들의 협조사실에 대한 사실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주민들을 보이는 즉시 총살했다. 또한 모든 가옥에 대한 방화를 했고, 소·돼지 등 가축에 대해서도 무차별 총격을 가해 살상했다. 주민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기 시작했으나, 미군들은 이들을 추격해 사살했다. 미군은 뒤늦게 피난 가는 만삭의 여성을 강간하기도 했다. 1951년 1월 10~12일까지 미군의 무차별적인 포격과 총격으로 주민 100여 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을 당했다.

미군에 의한 최대 피해는 곡계굴 사건이었다. 단양군 영춘면 상2리 느티마을 곡계굴에서는 마을 주민과 피난민 200여 명이 미군의 폭격과 기총소사로 사망했다. 1951년 1월 20일 미 공군 전투기 4대가 곡계굴을 한 시간 정도 네이팜탄으로 집중 폭격 했다. 연기와 불길이 굴속으로 번져 들어가 안에 있던 피난민 대부분이 타 죽거나 질식사했다.

인민군·지방좌익 퇴각하며 우익인사 집단학살
청주형무소 수감자 학살·인민재판 등 500여명 희생

민간인 학살은 인민군 점령 시절 북한군과 지방 좌익에 의해서도 저질러졌다. 이들에 의해 자행된 학살은 첫째, 보도연맹원 학살에 대한 보복 학살, 둘째, 인민재판에 의거한 학살, 셋째, 후퇴 시기의 집단학살 등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바로 후퇴 시기 형무소나 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던 우익인사 집단 학살이었다.

우선, 북한군이 충북지역을 점령하면서 보도연맹원 유가족과 지방 좌익에 의한 보복 학살이 이루어졌다. 1950년 7월 27일 오창초등학교에서는 인민재판이 열렸다. 오창보도연맹사건 관련자에 정치재판이었다.

오창보도연맹 사건은 충북 청원군 오창면 일대와 진천군 진천읍·문백면 일대의 보도연맹원 300여명이 1950년 7월 10~11일에 후퇴하는 군인에 의해 집단학살된 사건이다. 희생자들은 오창 양곡창고에 구금되어 있었고, 11일에는 미군의 폭격으로 2차 희생이 치러졌다.

보도연맹원 유가족들은 인민재판에 참여해 의용소방대장 김팽열을 몽둥이와 망치, 칼, 총으로 처형했다. 오창보도연맹사건 당시 김팽열이 권희만 오창면장의 보도연맹원 구명 시도를 제지했다는 이유였다. 권희만 면장이 후퇴 직전 오창 창고 열쇠를 갖고 있었는데, 창고 문을 열려고 하자 김팽열이 제지했고, 그로 인해 300여 명이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인민재판에 의한 우익 인사 학살은 충북도내 전역에 걸쳐 이루어졌다. 청원군 부용면 인민위원회는 1950년 7월 21일 면내 우익 인사 29명을 금강 변으로 끌고가 학살했다. 옥천군 청산면에서는 북한군과 지방 좌익들이 면내 우익 인사 독촉국민회·의용소방대·학생연맹 간부 17명을 보청천과 하서리 앞산에서 학살했다.

북한군과 지방 좌익에 의한 최대 학살사건은 청주시 대성동 동공원(현재 명장사 뒷산)과 무심천 서문다리 아래에서 발생했다. 충북도내 군경 가족, 우익 인사 등은 청주형무소와 청주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돼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북한군이 후퇴하기 직전인 1950년 9월 24~25일에 집단 학살됐다.

청주형무소에는 우익 인사 700여 명이 구금되어 있었다. 정치보위부의 명령을 받은 인민군과 빨치산, 지방 좌익 등이 우익인사들을 동공원으로 끌고 가 220명을 학살했다. 또한 청주형무소에 휘발유를 뿌려 방화를 해, 미군을 포함한 14명이 불에 타 죽었다. 청주 내무서에 수감되었던 경찰 김종열과 국민회 간부 남대희를 포함한 우익 인사 120명은 무심천 서문다리 아래에서 처형되었다. 또한 청주시 정치보위부에 감금됐던 95명 이상의 우익 인사들은 산성리 토굴에서 총살되었다. 즉 후퇴시기에 구금되었던 700명 중 449명 이상이 처형된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