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 장수가 할 말이 뭐 있겠는가. 국민의 선택에 조건 없이 승복한다. 세상은 옳든 옳지 않든 바뀌었다. 이 나라에 불안요인이 있는데 시간과 더불어 어떻게 대처할지 모르겠지만 패장이 무슨 할 말이 있을 수 있나.”

43년이라는 기나 긴 영욕의 세월 끝에 정계를 은퇴하는 김종필자민련총재의 귀거래사는 짤막했습니다. 기자회견도, 성명서도 없이 당선자 간담회자리에서의 퇴임선언은 쓸쓸하기까지 했다고 전합니다. 1961년 5월16일 35세의 젊은 나이로 쿠데타의 주역이 돼 분연히 세상에 나왔던 그가 정계를 떠나면서 남긴 몇 마디 퇴임의 변(辯)은 울분과 회한이 배어있어 보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43년 전 그와 5·16주동자들이 쿠데타의 빌미를 삼았던 4·19혁명 44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전국에는 때마침 부슬비가 내렸습니다.

JP는 10대 소년시절 독서광이었다고 합니다. 1971년 여름 자신이 펴 낸 ‘JP칼럼’에 보면 그는 중학교시절 학교를 결석하면서까지 일야일권독파주의(一夜一卷讀破主義)로 하룻밤에 한 권씩 책을 읽었다고 쓰고있습니다.

오늘 날 기회 있을 때마다 JP가 구사하는 현학적인 언어들은 10대 때 독서를 통해 섭취한 지식들이라고 그는 밝히고 있습니다. 때문인지 그때마다 툭툭 던지는 절묘한 한마디 한마디는 늘 시정의 화제가 되고 신문의 가십거리가 되곤 했습니다. 언제고 그의 입에서 나온 수많은 화두는 정치의 흐름을 말해주듯 자못 다채롭기만 합니다.

63년 공화당 사전조직사건으로 반김(反金)세력에 밀려 외유에 오를 때 내뱉은 ‘자의반타의반(自意半他意半)’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면서 당대의 유행어가 됐고 군자표변(君子豹變·변해야 할 때 변해야지 얼굴만 변해서는 안 된다), 사유무애(思惟無涯·생각함에 막힘이 없다), 줄탁동기(모든 것은 때가 있다), 몽니(심술을 부림), 소이부답(笑而不答·웃기만 할뿐 대답을 않음), 격화소양(신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다)등 그때그때 던진 한자성어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JP의 그러한 현란한 언어구사는 민자당 대표시절이던 1993년 ‘연작안지홍곡지지(燕雀安知鴻鵠之知)’로 극치를 이룹니다. 그는 개혁과 사정한파가 몰아치자 김영삼대통령에게 “제비와 참새가 어찌 기러기와 고니의 큰 뜻을 헤아리겠습니까”라면서 자신을 참새에 비유, 납작 몸을 굽혔던 것입니다. 왕조시대도 아닌데 지나치지 않느냐는 비판이 당연히 지식사회에서 제기됐습니다.

김종필, 그의 43년 정치인생은 영욕의 세월이었습니다.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던 중앙정보부장과 두 번의 국무총리, 공화당 당의장, 민자당 대표라는 권력의 중심에 있었으나 60, 70년대에는 처삼촌인 박정희 대통령과 측근들의 견제 속에 영광과 좌절을 거듭했고 80, 90년대에는 노회(老獪)한 처세술로 이 나라 정치 판을 재단했지만 끝내 1인자의 꿈은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타다 남은 토막나무처럼 추악함이 없느니, 아낌없이 타라, 타서 재가 되라”며 자신을 불태우고자 했지만 영원한 2인자로 대권의 자리에는 오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지금 JP는 “이제 완전히 연소돼 재가되었다”고 말합니다. 과연 아낌없이 타서 재가되었을까.

JP에 대한 평가는 엇갈립니다. 그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근대화의 기수’로, 부정적인 사람들은 ‘지역주의 정치인’이라고 폄하합니다. 어느 것이 옳든 그는 우리 현대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것만은 분명합니다.

참으로 아쉬운 것은 그가 마음을 비우고 좀더 일찍 정치를 떠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랬다면 노추(老醜)도 보이지 않았고 떠나는 뒷모습도 이처럼 초라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노병은 죽지 않고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라는 쓸쓸한 여운 속에 박수도 없이 영욕(榮辱)의 긴 그림자를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운정(雲庭) 김종필총재. 그는 진정 이 시대의 풍운아였습니다. 마지막 가는 그에게 동향 후학으로서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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