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 호 (신미술관 학예사)

지난 4월1일은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필요에 의해 처음으로 만든 고속기차 ‘KTX’가 개통된 날로 기술을 전해준 프랑스 ‘TGV‘가 화두에 올랐다. 그러나 10년 전만 해도 프랑스하면 과학기술보다는 예술을 더 먼저 떠오르게 하는 나라였다. 피카소의 열정, 마티스의 색채 그리고 고호의 우울 등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파리‘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파리’라는 도시를 특별하게 하는 또 하나가 있다. 바로 ‘파리’의 하늘을 덮고 있는 회색 빛 굴둑과 지붕 밑 다락방이다. 다락방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문학이 예술이 저절로 느껴진다.

1970, 8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에게도 ‘파리의 다락방’은 낭만 그 자체였다. 특히 파리의 대부분 유학생들에게는 저렴한 이 다락방이 유일한 생활공간이었다.
프랑스의 다락방은 예전에 부유한 집에서 일하던 하녀를 위한 공간이었고, 주로 고급 아파트의 꼭대기 층에 나란히 있는 한, 두 평의 작은 방들이다. 들어가는 문도 주인이 다니는 것과는 다르다. 아파트 뒷편에 승강기도 없이 8층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만 한다.

한 평 남짓한 다락방은 책상 하나에 책꽂이 하나, 일인용 침대 하나 놓으면 더 이상의 여유는 없다. 물론 화장실도 세면대도 방 안에는 없다. 복도에 달랑 수도꼭지 하나만 달려있어서 몹시 추운 겨울에는 세수하기도, 밥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가 빠진 접시, 모양이 다르고 낡을 대로 낡아버린 커피잔, 크기가 다른 수저들, … 그야말로 어느 것 하나 새 것이 없었다. 그래도 유학생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때면 의례 정들었던 다락방과 함께 이 낡은 물건 하나하나를 마치 소중한 보물처럼 다음에 오는 한국친구에게 넘겨준다. 이 물건들도 당연히 먼저 살았던 사람한테 받았던 물건들이다. 지나간 세월만큼이나 수없이 많이 지나갔던 사람들의 때와 냄새가 묻어나는 이것들이 유학생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했었다. 이 물건들은 생활을 위한 단순한 도구로서의 의미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인생의 깊은 의미를 느낄 수 있었고 그리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더 소중했던 것은 궁핍했지만 풍요로운 낭만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주엔 새 아파트로 이사 간 친구 집들이에 갔었다. 친구는 새집으로 이사 오면서 갖고있던 가구는 다 버리고 새로 장만했다고 했다. 아파트의 벽은 프랑스 루이14세 스타일의 우아한 외제 실크벽지로 꾸며졌고, 나폴레옹이나 사용했을 것 같은 화려한 침대며, 방마다 넘쳐나는 아기자기한 가구들은 유럽풍의 고가구처럼 보이지만 전부 새로 만든 외제품 카피들이었다. 그리고 극장식의 거대한 화면을 자랑하는 ‘텔레비전’도 거실의 3분의 1은 차지하고 있었다. 아파트가 물건으로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넓은 평수의 아파트는 숨쉴 여백이 없었다.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라 가구들이 사는 곳 이었다. 비단 이 친구네 집만이 아니다. 왜 아파트를 새 물건들로만 채우려고 하는 것일까?

나는 이 큰 아파트에서 10년 전 살았던 한 평의 다락방을 생각했다. 영국제 명품이라는 새 커피 잔에 마시는 커피 맛도 좋지만, 왠지 이 빠진 커피 잔에 마시던 그 때가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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