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함어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국장 조우리씨

사진/육성준 기자
장애는 선천적이었다. 부모님은 100일 지나서야 그것을 알았다. 조우리(30)씨는 뇌병변1급이다. 그런 조씨를 세상 사람들은 동정 어린 눈으로 때론 편견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정작 조씨는 사람 좋게 웃어 넘긴다.

사실 남들과 다를 것은 없었다. 남들처럼 대학에 입학했고 사랑을 했다. 결혼도 했다. 그것도 3살 연하와. 개구쟁이 6살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제천이 고향인 조씨는 충주의 한 특수학교에서 초·중·고를 나왔다. 그리고 충북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대학 4학년 때 고등학교 선배의 제안으로 ‘장애인 자립생활’에 대한 공부모임을 시작했다. 다사리 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그것이었다.

그곳에서 조씨는 지금의 남편인 이겨라(27)씨를 만났다. 이씨는 다사리에서 장애인들을 도와주는 활동보조인이었다. 이씨는 비장애인이다.

서로가 데면데면하던 시절, 우연치 않게 청주시내 장애인 편의시설에 관한 조사를 하면서 짝이 됐는데, 그 후 정말 인생의 ‘짝’ 됐다. 2007년 무렵이었다. 결혼식은 2008년에 올렸다. 그 사이 아들 ‘동균’이 태어났다. 물론 양가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동균이 태어나고 조씨의 부모는 이들을 인정했지만 이씨의 아버지는 아직 아니다. 이씨는 이에 대해 ‘자신의 잘못’이라 자책한다. 그런 남편이 아내는 참 고맙다.

조씨는 지금도 이씨와 처음 나눈 대화를 기억한다. 영화 ‘광식이동생광태’가 개봉했을 무렵이다. 조씨를 이씨를 보고 ‘광태’를 닮았다고 놀렸다. 그러고 보니 이씨는 배우 ‘봉태규’를 닮았다.

알콩달콩 사는 부부지만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2007년 조씨가 아이를 가졌을 무렵, 산부인과에 갔을 때다. 임신사실을 확인한 산부인과 의사는 “임신 4개월이네요. 낙태수술을 하려면 날짜를 빨리 잡아야겠네요. 언제로 할까요”라 말했다.

첫 아이에 대한 떨림으로 가득했을 이들 부부에게 산부인과 의사는 축하의 말보다 상처를 안겼다. 남편이 옆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조씨가 장애인이니 이씨 역시 장애인이라 생각했는지 의사는 다시 “남편은 청각장애인이냐. 지적장애인이냐”고 물었다.

비장애인임을 알리자 의사는 뭔가 대단하다는 듯 남편을 우러러 보았다는 게 조씨의 말이다. 안타깝지만 아직 세상은 이들 부부에게 차갑기만 하다. 시인 신경림은 ‘가난하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라고 말했다. 이는 조씨에게는 ‘장애가 있다고 사랑을 모르겠는가’로 치환된다. 육체가 불편할 뿐인데 세상은 머리에도 가슴에도 장애가 있는 줄 아는 걸까.

다사리에서 활동하던 조씨는 2009년부터 청주함어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지난 3월부터는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이전 직함은 다름 아닌 소장이었다. 소장에서 사무국장으로 바뀐 것이다.
조씨는 이에 대해 “일을 총괄하는 하던 위치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자리로 위치가 바뀌었을 뿐”이라 말했다. 일 욕심이 많은 조씨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청주함어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이름처럼 장애인의 자립을 도와주는 단체다. 과거 장애인들은 존엄성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시설에서 사육당하는 동물과 다를 바 없이 여겨지기도 했다. 시설에서 ‘관리’를 받으며 인권침해, 성적추행, 노동착취, 폭력에 시달리며 숨만 쉬며 살던 장애인들이 ‘자립’을 이야기하고 또 그렇게 된 것은 조씨를 비롯한 여러 활동가들과 장애인들이 무엇보다 높은 장애물을 넘고자 싸워온 결과물의 연장선상이다.

조씨는 요즘 충북에도 활동보조인연대를 만드는 일에 분주하다. 사실 청주함어울장애인자립생활센터가 활동보조인사업은 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조씨가 나설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조씨의 생각은 좀 다르다.

“활동보조인사업을 하지 않기 때문에 중립적으로 판단하고, 그 위치에서 바라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궁극적으로 이용자입장인 장애인들도 활동보조인의 처우가 좋아져야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을테니까요”

일 욕심이 많은 조씨지만 아이에게 있어서는 조금 더 당당한 엄마로 거듭나길 원하고 있다. 동균이가 조금 더 자라 세상에 나갈 때 엄마를 자랑스럽게 여겼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동균이가 엄마 조우리씨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날, 그 때가 멀지 않았다. 그때까지 ‘우리동균이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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