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정기호 당선 후 강혜숙·도종환 비례대표 진출
김형근 道·연철흠 청주시 의장…지방의회 주역으로

6월 항쟁 주역 정계진출 봇물

1987년 6월, 20여일에 걸쳐 거리거리에 울려 퍼졌던 ‘호헌철폐, 독재타도’의 함성은 마침내 대통령 직접선거를 쟁취해냈다. 그러나 12·12군사정변으로 집권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친구 노태우’의 입을 빌어 발표한 6.29선언은 당시 ‘속이구(속이고)선언’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민주화의 불길을 진화하려는 기만책에 불과했다. 그해 여름 뜨거웠던 노동자 대투쟁은 연말 대선으로 가는 정치구도 속에 묻혀버렸고 양김의 분열은 노태우 당선으로 귀결됐다.


그로부터 4반세기가 흘렀다. 6·10민주화운동 25주년을 맞아 도내 36개 시민사회단체와 정치권이 ‘6월 항쟁 25주년 행사 충북추진위원회’를 구성해 활동 중이다. 이들은 지난 4일 충북도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6월 항쟁이 남긴 역사적 과제를 되새기고 새로운 변화를 향한 국민의 꿈과 열정을 결집하기 위해 전국 규모의 국민행사를 추진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6월 항쟁을 통해 26년간의 군사독재를 마감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이 자리 잡는 등 정치적 민주주의는 쟁취했지만 여전히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완성하지 못했다”며 “미완의 6월을 완성하는 길은 99%의 국민이 승리하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당시의 스무 살 청년은 이제 40대 중반이 됐다. 그동안 30대와 40대, 40대와 50대 사이에 뚜렷한 선을 그으며 투표성향의 차이를 보여 온 내면에 6월정신이 똬리를 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역에서도 6·10민주화운동이 가져다준 성과는 찬란하다.

곳곳에 묻혀있던 잠재력을 동력화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도 주민들의 사회의식을 폭넓게 일깨웠다. 그리하여 각 계층별, 분야별로 다양하게 결집해 1990년대 이후 시민사회운동을 이끌어왔다.

운동의 주체들이 제도정치권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도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는 2010년 지방선거를 계기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6·10민주화운동 출신 국회의원 1호는 1992년 14대 총선을 통해 여의도에 입성한 정기호(청주을) 전 의원이다. 정 전 의원은 1987년 당시 정치권과 재야, 종교계가 총망라됐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에 정치인으로 참여했다. 민변 소속 변호사이자 민주당 정치인이었던 정 전 의원은 13대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14대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도종환 의원 지역밀착 기대

재야(학계) 출신의 첫 당선자는 2004년 17대의 강혜숙(민주당·비례대표) 전 의원이다. 강 전 의원은 서울의 이애주 교수와 함께 살풀이를 통해 무용을 시위현장과 접목시킴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강 전 의원은 1984년 ‘우리춤 연구회’를 만들었으며, 1987년 ‘목요마당’이라는 이름으로 연속공연을 펼쳤다.

1987년 당시 문화운동의 주역으로, 1989년 전교조 창립을 주도했던 도종환 시인은 이번 4·11총선에서 민주당 비례대표로 당선됐다. 도 의원은 1986년 충북민주운동협의회 문화분과에서 활동을 하며 6·10민주화운동에 참여했으며, 대중시위 과정에서 참여문학과 민중미술, 현장공연 등 문화역량의 강화는 1987년 12월4일 민예총의 전신인 ‘충북문화운동연합(의장: 강혜숙·도종환·이철수)’의 창립으로 이어진다.

국본 참여 당시부터 정치인이었으며 지역구 출마를 통해 국회에 입성한 정 전 의원과 달리 강 전 의원과 도 의원 모두 문화예술계 몫으로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그러나 도세가 약한 충북은 비례대표 의원에 대해서도 지역연고를 따지며 지역구 의원처럼 대우하고 있다.

도 의원은 특히 2008년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으로 중앙무대에서 활동한 것을 빼고는 청주 개신동과 보은군 내북면 법주리에 거주하며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도 의원은 4월27일 충북도청에서 열린 지사 초청 국회의원 당선자 간담회에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6월11일에는 충북경제자유구역 조기 지정을 촉구하기 위해 충북 국회의원과 홍석우 지식경제부장관이 만나는 자리에도 충북 출신 비례대표 의원 가운데 유일하게 참석했다.

이밖에 국본 사무처장을 지낸 운동권 1세대 정지성 문화사랑 대표가 지난 총선에서 통합진보당 후보로 청주 상당에 출사표를 던졌으나 야권연대 과정에서 민주당 홍재형 후보로 단일화된 바 있다.

2010년 지방의회 대거 진출

아직까지는 여의도로 가는 길이 비례대표를 통해서만 열려있었다면 지방정치를 향한 도전은 보다 적극적이었다. 지방의회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 인물은 연철흠 청주시의회 의장이다. 청주대 사회과학대 삼민투위원장 출신으로 6·10당시 청주민청에서 활동했던 연 의장은 2002년 7대 청주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뒤 9대까지 3선에 성공하며 의장자리에 올랐다.

6·10세대의 정계진출이 봇물을 이룬 것은 2010년 지방선거를 통해서다. 정치권과 연대한 국본에 앞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의 지역조직인 충북민주운동협의회 사무국장을 지낸 김형근 충청북도의회 의장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김 의장은 “6월 항쟁을 통해 노동·농민운동, 청년·여성·문화운동 등 다양한 이해와 요구가 분출하고 결집함으로써 민주화를 실현할 수 있었다”면서도 “현재는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 정권의 언론장악, 종북 매카시즘 등으로 그 정신이 훼손됐다. 다시금 국민들의 자각과 참여가 요구되는 상황에 놓여있다”고 말했다.

이광희 충북도의원은 6·10 당시 충북대 부총학생회장으로 학생지도부 가운데 한 명이었다. 또 윤송현 청주시의원은 서울대를 졸업한 뒤 지역에 내려와 있으면서 6·10 과정에서 국본 홍보분과에 가담했다. 이용상 청주시의원은 충북대 영문과를 중퇴한 뒤 당시 노동현장에 있었다.

학생주역들, 정치권 주변에서 대기 중
충북대 유행렬·박영호…청주대 백상진·유수남

선출직은 아니지만 6·10의 주역 가운데 상당수는 정치권 주변에 있다.
유행렬 민주당 충북도당 사무처장은 1987년 충북대 총학생회 간부로 시위주도 과정에서 구속됐다. 1989년 총학생회장을 역임했고, 2002년 청주 흥덕갑 출마를 준비했으나 전략공천에 밀렸다.

1987년 충북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박영호 씨도 2002년 청주 흥덕갑에서 전 충대 학생회장끼리 공천을 다투는 듯 했으나 오제세 의원에게 밀린 뒤 중앙당으로 올라갔다가 고향 춘천에서 와신상담 중이다. 지난 민주당 최고위원선거에서는 우상호 후보 조직본부장을 맡는 등 재기를 노리고 있다.

청주대 출신으로는 백상진 충북도 대외협력관이 있다. 86학번인 백 협력관은 6·10의 지도부는 아니지만 1989년 청주대 총학생회장을 지내고 이시종 지사가 국회의원을 지낼 당시부터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고 있다.

6·10 당시 가두투쟁을 지휘했던 소위 야사(野司) 출신의 유수남 현 도봉구 개방형 감사관도 강혜숙 의원 보좌관,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 전문위원 등으로 계속해서 정치권 주변에 머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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