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년 전 그해 4월도 내내 날씨는 청명했습니다. 새들은 무심히 하늘을 날고 시냇물은 쉬 임 없이 흘러갔습니다. 척박한 대지, 그 땅 산수간에는 어김없이 봄이 무르익었고 꽃은 다투어 사방에 만발했습니다. 보릿고개가 시작될 무렵이었지만 피 어린 함성과 총성만 없었던들 세상은 예나 다름없이 태평해 보였습니다.

‘4월혁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1948년 집권이래 숱한 파동을 일으키며 영구집권을 획책하던 자유당정권이 정부통령선거에서 패색이 짙어지자 관권을 총 동원해 전국적인 부정선거를 자행한 것이 발단입니다.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서울에서 지방으로 확산된 가운데 마산에서 시위 중 실종되었던 고교생 김주열군의 시체가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부두에서 물위로 떠오르자 경찰의 만행에 대한 전 국민적 분노는 불에 기름을 부은 듯 순식간에 폭발하고 맙니다.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19일 하루 동안 총격에 죽은 사람이 서울에서만 100여명이 넘었고 몇 일 동안 전국에서 186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부상을 당한 사람도 6026명이나 됐습니다. 수많은 목숨을 앗은 반독재 시위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할 때까지 전국에서 들불처럼 타올랐습니다.

결국 관제국부(官制國父)로 떠받들어져 종신집권을 꿈꾸던 독재자 이승만은 이 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민의 힘에 의해 권좌에서 끌어 내려지고 맙니다.

평소 아무 힘도 없어 보이던 국민들이었지만 한번 일어서면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가 되는가를 보여준 혁명이었습니다. 그것은 학생혁명, 민중혁명, 국민혁명이었습니다. 하지만 ‘4월혁명’은 불행하게도 꿈을 펴기도 전에 이내 권력에 눈이 먼 정치군인들의 5·16쿠데타로 군홧발에 짓밟히고 맙니다.

그리하여 ‘4월혁명’은 30년이 넘도록 그 이름조차 얻지 못한 채 ‘4·19의거’ ‘4·19학생의거’ ‘4·19’ ‘4·19혁명’등으로 그때마다 제 각기 불려 오면서 군사정권의 의도적인 홀대를 받아야 했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등 정통성 없는 군사독재자들은 하나같이 국민에 의한 정권찬탈이라는 사실 자체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4월혁명’이 제 이름을 찾은 것은 1993년 4월19일 김영삼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서울 수유리의 4·19묘지를 참배하면서부터 입니다. 4·19가 제대로 역사의 평가를 얻기까지는 33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려야 했습니다.

세월은 흘러 당시 교문을 박차고 나와 거리를 질주하던 젊은이들은 이제 이순(耳順)의 나이가 되었고 그 해 세상에 태어난 4·19동이들도 불혹의 40대가 되었습니다. 나라는 민주화되고 경제는 좋아 졌지만 사회는 여전히 시끄럽고 어수선합니다. 국론은 갈리고 정쟁은 계속되고 힘을 가진 자들의 부정과 부패는 예나 다름이 없으며 지역 간, 세대 간, 계층간, 빈부간의 갈등은 날로 더 해만 갑니다.

4·19혁명의 숭고한 정신이 자유민주주의의 쟁취와 부정부패의 척결이었다면 그 혁명은 끝난 것이 아니라 아직도 진행중인 ‘미완의 혁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숭고한 4·19정신은 지금 어느 누가 잇고 있으며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44년 전 그때 목이 터져라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를 내 달렸던 한 사람으로서 오늘의 이 혼란스럽고 부패한 사회를 보는 심정은 한 마디로 슬프고 착잡하기만 합니다. 역사의 발전이란 이렇게도 어려운 것인가.

선거로 들뜬 4월이 가고있습니다. 햇빛은 눈부시고 꽃들은 다투어 피지만 영화제목처럼 봄날은 가고 있습니다. 큰절로, 삼보일배로, 눈물로, 삭발로, 단식으로 ‘생 쇼’를 벌이던 이상한 선거도 끝이 나고 봄날은 그냥 흘러갑니다.

그날의 영령들이 잠들어있는 서울 수유리 4·19묘역의 빛 바랜 비석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되살아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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