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횡단열차에서 잃어버린 동포를 만나다

청춘에 떠나는 여행, 세계일주 ④블라디보스토크

이명국
1986년생, 대학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학군장교로 임관 후 중위 전역. 스펙으로 경쟁하며 아픈 청춘을 거부하고 군 복무간 모은 적금으로 세계일주 시작. 항상 길 위에 삶과 이야기를 보며 나의 ‘앎’을 위한 여행 중. 일년 반의 시간 동안 세계 6대륙, 총 40개국 여행 예정.
※블로그: 니오타니의 일년 반 세계일주 (http://freelmg.tistory.com현재좌표는 독일 뮌헨

▲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의 바닷길을 제외하고 모두 얼어버린 바다. 러시아의 추위를 가늠할 수 있다.

일본 사카이미나토에서 출발해 동해를 경유, 2박 3일 만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얼지 않는 항구라 불리는 블라디보스토크항. 배가 드나들 수 있는 길을 빼고는 모두 얼어 있었다. ‘동방을 지배하라’라는 뜻의 블라디보스토크, 그 뜻처럼 동해 연안의 최대 항구 도시로 1800년대 중반부터 러시아의 의해 항구와 도시가 건설되면서 무역항으로 크게 발전했다. 이후 1903년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개통되면서 극동과 유럽을 잇는 시발점이 됐다. 물론 한반도에서 유럽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길이다.

무역자유화를 위해 새 단장하는 레닌

도착 다음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탑승하기로 예약해 첫날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를 돌아보기로 했다. 시내에서 볼 것은 대부분 동상이나 기념비가 전부였지만 처음 느끼는 러시아 도시의 분위기는 얼어버린 바다만큼이나 냉랭했다. 내가 러시아를 오기 전에 알고 있었던 러시아인 특유의 분위기와도 일치했다. 어느 곳이든 우리와 다르게 처음에는 정답지 못하고 차갑게 대하는 듯 한 태도가 처음에는 불쾌하기도 했다.

그러다 블라디보스토크역 맞은편에 있는 레닌을 만났다. 소비에트가 무너지고 실패한 혁명이라 한들 그는 계속 자리를 지켰다. 사회주의를 버린 러시아는 올해 9월에 열릴 ‘블라디보스토크 루스키 섬 APEC 정상회담’ 준비로 곳곳이 공사 중이다. 레닌동상 주변으로 작은 광장이 새로 조성되며 내륙과 루스키 섬을 잇는 다리, 호텔 신축공사까지 모든 거리가 분주하다.

▲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 만난 북한 사람들. 남북이 만나 동서를 달리는 경험은 어느 여행보다 뜻 깊다.

특히 이번 회담으로 전혀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루스키섬을 APEC 개최와 연계해 관광레저특구로 조성하면서 준비비용만 100억 달러가 책정됐다. 이는 밴쿠버 올림픽 준비 비용보다 5배 많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새로운 도시로 만드는 것과 같다고도 애기한다.

레닌동상에서 조금 내려가 보면 주 정부청사 옆에 중앙광장(혁명전사광장)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각종 국가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대표적인 국가 유적지 중 하나다. 이곳에는 1917년부터 1922년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비에트를 위해 싸운 병사들의 기념비가 있다.

병사들은 1917년 러시아혁명 후 소비에트를 무너뜨리기 위해 파병(대소 간섭)됐던 연합군과 싸웠다. 당시 연합군은 총 14개국이 파병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했으며 특히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군의 수가 가장 많았다.

그러자 소비에트 혁명군은 6년 동안 연합군과 맞서 싸웠으며 마지막으로 1922년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를 되찾을 수 있었다. 물론 연합군과 맞서 싸운 혁명전사들의 주변도 경제협력과 무역자유화를 위한 준비로 한창이다.

▲ 시베리아 횡단 열차 내부. 6인실(플라츠카르타)가 가장 저렴한 좌석으로 통로를 중심으로 2인과 4인으로 나뉜다.

그들의 혁명은 우리를 좌우와 남북으로 나눴다

러시아의 역사지만 우리의 역사와도 밀접하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체코군의 장비를 몽양 여운형선생의 주도로 우리 독립군이 대량으로 구매했다. 이후 청산리전투 때 김좌진, 홍범도 장군 등이 이끄는 소수의 독립군이 이 신식무기로 일본군을 대파해 항일전쟁 중 최대의 성과를 올렸다.

이처럼 190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블라디보스토크는 우리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당시 신 한촌을 중심으로 대한광복군, 권업신문, 대한국민의회, 한민학교 등 다양한 단체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면서 ‘상해임시정부’의 기틀을 다졌다.

하지만 1917년 소비에트 혁명으로 독립운동 단체에서도 좌우가 대립하고 1922년 스탈린의 소수민족 탄압책으로 독립운동이 위축되면서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기도 했다. 그만큼 러시아 혁명의 영향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미친 영향이 크다. 당시 좌우의 대립으로 시작된 남북의 분단은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동서를 잇는 길에서 만난 남과 북

열차시간까지 블라디보스토크를 둘러 본 후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탑승했다. 탑승한 열차는 6인실(플라츠카르타)로 통로 양옆으로 4인과 2인으로 나뉜다. 6인실 요금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12만원 내외다.

밤이 늦어 바로 매트리스 펴고 누웠지만 잠이 오질 않는다. 러시아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동양인이 있으니 그들의 낯선 눈길과 어색함이 느껴졌다. 그들도 바로 잠이 오질 않는지 한창 술을 마시며 떠든다. 나도 뜨거운 커피에 보드카를 타 마셨다. 한창 술을 마셨던 이들도 취해 자리에 눕고 나도 열차의 떨림에 적응될 즈음 잠이 들었다.

▲ 혁명전사 광장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비에트를 위해 싸운 병사들의 기념비가 있는 곳으로 이곳에서 모든 주요 행사가 개최된다.

다음날 잠에서 깨자 어제의 어색함이 무색해졌다. 나와 같은 칸을 쓰는 러시아 아저씨와 할머니,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청년은 내게 러시아어로 물었다. 정확한 뜻은 알지 못하지만 대충 어디까지 가는지,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질문 이었다. 나도 이르쿠츠크까지 간다고 하고 ‘코리안’이라고 하자 다시 묻는다.
“북쪽 이야 남쪽이야?”

남과 북의 코리아, 앞으로도 무수히 들어야 하는 질문들이다. “남한이요.”라고 하자 다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좋아한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한국은 삼성이나 LG, 현대 등에서 만드는 제품들을 친숙하고 좋은 제품으로 평가하면서 한국을 매우 잘사는 나라라고 생각했다. 영어가 통하지 않아 자세한 얘기는 나누지 못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냉랭한 태도와는 다르게 모두 친절했다.

이후 러시아 아저씨와 할머니는 낱말퍼즐을 하고 우즈베키스탄 청년은 잠을 잤다. 나도 준비한 책을 보는 중에 옆 칸에서 뜻밖에 한국말이 들렸다. 옆 칸에는 동양인 아저씨 3명이 타고 있어 인사라도 하기 위해 “한국 사람이세요?” 라고 물었다. 그러자 “북조선 사람입네다. 남조선에서 왔시요?” 라고 답한다. 이런 곳에서 북한사람들을 만날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그들도 나를 경계하기 보단 반가워했다. “점심 드셨시요? 안 드셨으면 함께 듭세다” 그렇게 함께 자리에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은 러시아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로 이번 겨울에 잠시 고향인 평양에 들렸다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북한에서 러시아로 열차를 타고 넘어와 새벽에 갈아탔다고 했다. 나도 여행 중이라는 걸 설명하고 이런저런 애기를 하며 가까워 질 수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한국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는데 대부분의 질문이 한국의 경제상황이나 실생활에 관한 것 이였다.

“남한에서 한 달 생활비는 얼마요?”, “남한의 대기업은 무엇을 해요?” 같이 단순한 질문들이었지만 그들의 상황에서 이해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한국경제와 정치, 실생활까지 자세히 설명 해 주자 그들은 남조선이 잘 사는 건 인정하지만 정치나 양극화 문제에 대해서는 북조선이 더 낫다고 자부했다.

대화가 깊어질수록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이 말하는 북한문제에 관한 결론은 모두 ‘수령님 만세’였다. 지금 경제가 어렵고 전력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는 미국과 싸우는 중이기 때문이라며 이 싸움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언젠간 모두 해결 될 겁네다. 미국과 싸우기 위해서는 우리 인민들도 감수해야죠. 게다가 미 제국주의의 맞서 싸우는 건 우리 밖에 없습네다.”, “남조선은 우리와 적이 아닙네다. 통일해야 할 동포지만 미국놈들 앞잡이들 때문에 못합니다.”

게다가 우리와 해방 전까지의 모든 역사인식도 달랐고 모두 주체사상 중심이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차이를 떠나서 그들도 누군가의 아버지였으며 자식들이 잘되길 바라는 것은 같았다. 나에게도 식사 때마다 음식을 챙겨주며 “조선 사람은 좀 시뻘겋게 먹어야 합네다.”라며 고향에서 싸온 고추장을 주고 함께 북한산 인삼주도 나눠 마셨다.

그러다 내 아이폰을 보며 얼마나 신기해하던지, 이걸로 영화를 볼 수 있고 음악을 들으며 인터넷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신기해했다. 그래도 왜 남조선 사람이 삼성 안 쓰고 미제를 쓰냐고 타박이다. 그러다 외국에서 아이폰으로 한국으로 전화 할 수 있냐고 묻기에 무선 인터넷만 되면 영상통화도 할 수 있다고 하자 놀란다.

자기들은 러시아에서 고향으로 전화도 하지 못한다고 했다. 집에서는 국제전화를 받을 수 없단다. 가족들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목소리도 듣지 못한 채 러시아에서 1년씩 일을 해야 하는 그들이 측은해졌다.

그렇게 열차에서 시간이 흐르고 내가 갖고 온 ‘우노’카드 게임을 알려주고 함께 카드를 했다. 단순한 카드 게임이었지만 처음 접한 아저씨들은 재밌어했다. 이후에도 심심할 때마다 “추패(카드)할 수 있시요?”라며 다가와 함께 맥주내기로 카드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바이칼호수를 보며 남과 북에서 온 우리는 함께 달렸다.

짧은 시간동안 우리는 꽤 가까워졌지만 내가 먼저 이르쿠츠크에서 내리면서 헤어지게 됐다. 내리기전에 북한 아저씨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나를 걱정해주며 말했다.

“조심히 가시라요. 세계일주 하려면 몸이 제일 건강해야 합네다.”, “언젠 통일 되면 또 볼 일이 있겠지요.” 나도 답했다. “네. 아저씨. 우리 통일되면 만나요. 그땐 제가 서울에서 기차타고 갈게요.”

부산역에서 유럽으로 가는 날

그들을 뒤로한 채 나는 이르쿠츠크에 내렸다. 4일 동안 시베리아를 달려오면서 만난 이들과의 추억. 러시아인들을 비롯해 중앙아시아 사람들과 남과 북의 우리는 같은 기차를 타고 동에서 서쪽으로 끊임없이 달렸다. 단지 동과 서를 잇는 길보다 그 속에서 어울릴 수 있는 순간들이 더욱 뜻 깊었다.

지금까지 위로는 막히고 3면이 바다인 우리 땅은 섬나라와 같다. 우리 땅에서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우리의 길은 끊겼고 우리의 생각과 삶도 거기서 막혔다. '한반도 종단 철도'가 개통 돼 우리의 길이 다시 이어진다면 철마와 함께 우리도 달릴 수 있다. 부산역에서 열차를 타고 유럽으로 가는 그날. 나는 다시 배낭을 메고 열차에 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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