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총선이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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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총선이 남긴 것
  • 한덕현 기자
  • 승인 2004.04.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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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달라' 왜곡된 선거문화, 변형 지역감정 판쳐

17대 총선에선 새로운 단어가 하나 탄생했다. 이른바 ‘감성정캄.  지나간 역대 총선에선 전혀 듣지 못하던 새로운 선거용어다. 말 그대로 17대 총선의 가장 큰 변수는 ‘감성’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이 말이 선거전 막판까지 유권자를 혼돈스럽게 했다. 

이런 감성정치의 단초는 대통령 탄핵이라는 의정사상 초유의 의회쿠데타였고, 여당과 야당은 이 언저리에서 감성정치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냈다.  탄핵안이 가결되던 국회에서의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오열,  방송 연설회에 나온 한나라당 박근혜대표의 눈물, 삼보일배 및 휠체어와 반추되는 민주당 추미애의원의 비틀거리는 모습, 그리고 우리당 정동영의장의 단식, 이 모든 것들이 결국 유권자들한테 얻으려했던 것은 감정과 감성이었다.
 

  각 당 지도부가 바람몰이 부추겨,  개혁의지는 일찌감치 실종  

 ■정책선거는 면피용 들러리: 17대 총선전의 초반만 하더라도 정치개혁에 대한 국민기대감은 컸었다. 참여정부 출범 이후 여야의 끊임없는 정쟁, 그것도 정책보다는 특정인의 말꼬리를 물고늘어지는 이전투구에 식상한 국민들은 새정치의 출현을 이번 17대 총선의 지상과제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나 탄핵의 부당함에 맞서는 국민적 저항의식의 표현인 촛불집회가 야당에 의해 ‘감성의 이벤트’로 왜곡되면서 17대 총선은 끝내 감성의 블랙홀로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이번 선거전을 일관되게 지배한 분위기는 “살려주세요”였다. 한나라당이 영남에서, 민주당이 호남에서, 자민련이 충청에서 이렇게 “살려 주세요”를 외쳤고,  전국정당을 표방한 열린우리당마저 정동영당의장의 선대위원장 사퇴와 단식으로 유권자의 ‘보호본능’을 자극한 것이다.

실제로 이번 17대 총선의 한가지 특징중 하나가 ‘위장된 겸양’이다. 여야가 모두 위기의식을 강조하며 자기 당의 세불리를 표면화시키려 안달이었던 것은 일종의 동정심을 촉발시켜 반사이익을 얻기 위함이었다.  이는 민주(독재) 대 반민주(반독재)의 대립각으로 자기 당의 당위성을 내세우며 대세론을 주창하던 과거 권위주의 정권 때의 선거전이나,  386으로 상징되던 16대 때의 이미지 선거전과는 사뭇 다른 현상이다. 

각 당이 선거전 막판까지 매달린 것은 이러한 ‘감성을 향한 읍소’였고,  그 와중에서 정책대결은 일찌감치 실종된 것이다.  이처럼 각 정당의 대표가 심정적(?) 연고지로 내쳐 달려가 지지를 호소한 것은 망국적 지역감정의 ‘변형된 행태’라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실제로 17대 총선결과는 영남 한나라당 압승, 호남 열린우리당 독주로 나타나 지역감정의 악령이 다시 살아 났음을 입증하고도 남았다.  정책선거와 지역감정 타파가 얼마나 지난한 과제인지를 다시 한번 일깨웠다. 

물론 이번 선거에선 방송사등을 통한 후보자 토론회가 집중 시행되면서 정책선거를 위한 노력이 다각도로 시도됐다. 개정 선거법에 근거한 정책토론회가 대표적 사례다. 특히 각 당의 대표자급 인사가 출연해 자기 당의 정책방향과 공약 등을 제시한 후 타당 후보들로부터 검증과 진단을 받으며 난상토론을 벌인 방송토론회는 미디어 선거의 압권이었다. 그러나 이런 정책선거전에도 불구, 유권자 표심의 대세를 가른 것은 감성으로 촉발된 ‘바람현상’이었다. 

결국 정책선거는 이번 17대 총선에서도 면피용 내지 구색맞추기 수준의 들러리로 전락한 것이다.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열린우리당 정동영의장의 노인폄하 발언 파문이다. 한 정치인의 지엽적인 말실수가 이번처럼 선거전의 판도를 바꾼 사례도 없다. 16대만 하더라도 노골적인 지역감정이나 색깔론을 부추기는 발언들은 일과성 논란으로 지나쳤지 이번처럼 선거판을 송두리째 뒤흔들지는 못했다. 


 정치철학, 명분보다 당선이 중요,  생색내기에 그친 국민경선
 
■상향식 정치는 여전히 남겨진 과제: 당초 17대 총선의 최대 화두였던 국민경선, 이른바 상향식 정치는 여전히 숙제로 남게 됐다. 여야가 경쟁적으로 국민경선을 강조했지만 성과는 역시 ‘면피’ 수준에 불과했다.  초반에 시범 실시된 경선에서 잘 나가는 현역의원이 고배를 드는가 하면,  현 정부의 실세 출신들이 정치신인한테 떨어지는 등 이변이 연출돼 이런 센세이션이 ‘새정캄의 시험대로 인식되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분위기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다수 의석 확보를 위해 당장의 당선 가능성에만 집착하던 정당들이 ‘보이는게 내 떡’이라는 편의적 발상으로 정치적 신념보다는 명망가 위주의 외부인사 영입에 사활을 걸다 보니 국민경선 자체가 무색하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충북에서 특히 심했다.  열린우리당은 보은옥천영동, 한나라당은 청주 흥덕 을구에서 단 한번씩의 경선만으로 국민과의 약속을 때웠다.  열린우리당의 경우 예비후보 3명이 서로 박빙의 지지도를 보이던 청주 흥덕 갑구마저 면접을 내세워 낙하산공천으로 밀어 부치는 바람에 도민들의 실망을 샀다. 결과론이지만 이곳 선거구에서 만약 국민경선으로 후보를 결정했다면 열린우리당후보가 더 압승했을 것이라는게 당내의 공공연한 얘기다.

보수 정당들과는 달리 민노당은 일찌감치 당내 경선을 통해 전국 각 선거구의 후보를 결정함으로써 차별화에 성공했다.  진보정당의 기치가 기대 이상으로 국민들에게 먹혀 든 것은 이같은 민주적 절차와 과정을 중시한 선거전략이 기성정치에 식상한 유권자에게 크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특히 보수적 정치성향으로 치부되던 충북에서 민노당후보에 대한 지지도가 타 시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게 나왔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시민운동의 활성화에도 기인한 측면이 크다.  지난 대선 때도 민노당은 충북에서 지지도 5·75%로 울산의 11·41%에 이어 전국 두 번째의 득표율을 기록,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실 민노당의 약진은 정치와 선거에 있어 ‘원칙’과 ‘정책’의 승리라는 점에서 앞으로 한국정치에 미칠 영향이 막대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민노당이 선보인 진성당원 주축의 정당문화는 앞으로 우리나라 정당발전에도 결정적 ‘요체’로 작용할 전망이다. 보수정당들이 말로만 국민경선을 실시한 반면 민노당은 정당정치의 가장 이상향인 ‘당비를 내는 진성당원들이 직접선거를 통해 당의 이념에 가장 적합한 인물을 후보로 선출하는 것’을 실제로 선보임으로써 그동안의 기형적 정당관념에 일종의 쿠데타를 가한 것이다.

민노당의 이러한 정당문화 선도는 앞으로 보수정당들의 정체성 확립에도 큰 영향을 미칠게 확실하다.  선거전 초반 보수 정당들이 마치 민주정치 실현에 있어 전가의 보도처럼 홍보하던 국민경선도 진성당원 확보없이는 탁상공론에 불과함을 민노당은 그 실체로써 보여준 것이다. 민노당의 이러한 ‘앞서감’이 결국 유권자를 파고 든 것으로 분석된다.  
 
 “차라리 진보정당을 믿겠다.”  정치지형에 지각변동 예고

 
 ■진보정당 시대 개막: 과거 보수정당의 흑백논리에 파묻혀 철저하게 봉쇄당했던 진보정당의 전면 등장은 그만큼 파괴력이 클 수 밖에 없다. 민노당의 원내진출, 그것도 제 3당을 차지한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국 정치사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각별하다.  우리나라 진보정치의 역사는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승만 정권에선 조봉암 등 진보정당의 대표가 빨갱이로 몰려 정치적 죽임을 당했고, 4·19 이후 과도정권기를 통해 진보정치가 다시 부활을 시도했으나 국민들에게 별다른 이미지를 안기지 못한채 5·16 쿠데타로 그나마 설 땅마저 잃게 된다.  현재 민노당으로 상징되는 진보정치의 출현은 길게는 87년 6월 민주항쟁,  짧게는 ‘국민승리 21’로 대통령후보를 냈던 97년 15대 대선에 근거한다.

그 때까지도 진보정당과 진보정치는 합법적인 공간을 마련하지 못한채 항상 ‘비제도권’으로 인식돼 일반 유권자들한테도 왜곡, 각인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번 민노당 원내진출의 내용적 분석은 민노총으로 상징되는 노동운동과 촛불시위로 상징되는 시민운동의 개가라는 점이다.  기득권에 의해 강요되는 정치가 아닌, 말 그대로 기층과 민중세력에 의한 자발적 ‘정치력’의 발현이라는 점에서 향후 민노당이 펼칠 정치력이 주목되는 것이다.

당장 국민들은 국회에서의 민생법안 처리와 서민 노동자 대변에 민노당의 역할이 클 것으로 기대한다. 아울러 이번 17대 총선전 내내 차떼기 가방떼기 책떼기 등 ‘떼기’로 점철된 부패정치의 척결에도 진보정당이 ‘세제(洗劑)’ 역할을 자임할 것을 바라고 있다.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은 향후 보건복지위, 환경노동위, 농림해양수산위, 통일외교통상위 등 상임위활동에도 근본적 변화를 몰고 와 그동안 철저하게 억압됐던 ‘소수의견’이 오히려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전망된다.

 ■돈선거 근절, 전국정당 가능성 열어: 이번 17대 총선에서 가장 확실하게 얻은 것은 소위 돈선거의 근절 가능성이다. 여전히 금품선거의 악령이 여러 곳에서 살아났지만 ‘선거는 곧 돈’이라는 인식엔 획기적인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요즘 사석에서 많은 서민들이 “이젠 나도 출마할 수 있다”고 공공연히 농담을 주고받는데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어쨌든 17대 총선은 ‘돈’에 한해선 가히 혁명적 발상의 전환을 가져 온게 분명하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먹은 돈(?)’의 50배를 토하게 만든 선관위 등 당국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대다수 국민들은 앞으로의 각종 선거에서도 이런 결연한 신념을 곧추세우기를 바라고 있다.

비록 극소수이지만 열린우리당이 영남에서도 당선자를 냄으로써 일단 전국정당의 가능성을 열어 놨다. 정치개혁의 최대 관건이 지역주의 타파임을 감안할 때 17대 총선은 그 ‘물꼬’를 터준 셈이다. 아쉬운 것은 선거막판에 정당들이 서로 상대의 말 실수를 물고 늘어지며 지역정서를 기술적으로 부추겼다는 점이다. 이런 구태정치 행태에 대한 심판은 여전히 유권자의 몫으로 남게 됐다.     / 한덕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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