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나의 서양음악 순례>

1971년 4월 20일, 국군보안사령관 김재규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정부 전복을 획책하고 있던 간첩단 42명 등 51명을 검거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이날 각 신문은 “서울대 대학원생 서승은 1968년 북한으로부터 밀봉교육을 받고 일본을 경유하여 한국에 들어와서 유학생으로서 대학원에 적을 둔 뒤 친동생 등 20여 명을 포섭하여 각 대학의 연합전선을 결성, 박대통령의 3선개헌 저지운동을 추진하였다”고 보도하였다.

이후, 서승(1945~ )은 사형, 친동생인 서준식(1948~ )은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으며, 1972년 5월 23일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7년의 형이 확정되었다. 서준식은 7년의 형기를 마친 1978년 5월 27일, 전향서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회안전법상의 보안감호 처분을 받아 즉시 재수감되었다.

그리고 매 2년마다 갱신되는 보호감호처분을 5번이나 받아 10년을 더 감옥에 있어야 했다. 서준식은 1988년 5월에 석방되었고, 서승은 2년 뒤인 1990년에 풀려났다. 이들은 각각 17년 그리고 19년 동안 수감되어 있었다.

두 형이 끌려간 1971년, 서경식(1951~ )은 스무살이었다. 서경식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20년 가까이 두 형을 옥바라지했다. 형들이 모두 석방된 다음해인 1991년에 서경식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펴냈다. 이들 삼형제가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까닭은 1928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 일본에 왔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고향은 충청남도였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아버지는 생계를 잇기 위해 일본 교토에 남았고 6·25전쟁이 일어나 귀국은 더욱 먼 일이 되었다. 서씨 형제의 부모는 두 아들을 감옥에 둔 채, 1980년과 1983년에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서경식은 스무권의 책을 펴냈다. 서경식은 자신을 디아스포라(diaspora)의 일원이라고 말한다. 디아스포라는 이산(離散)을 뜻하는 희랍어로, 국외 추방자, 정치적 난민, 외국인, 이민자, 소수인종 및 민족집단 성원과 같은 다양한 범주의 사람들을 일컫는다.

최근 펴낸 책의 제목도 <디아스포라의 눈>이다. 디아스포라의 기본 정서는 멜랑콜리(melancholy)일 수밖에 없다. 멜랑콜리는 원래 ‘검은 담즙’이라는 뜻으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의학용어였다. 그들은 쓰디쓴 쓸개즙 안에 우울과 비애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서경식의 산문에는 가없는 그리움과 쓸쓸한 외로움이 배어 있다. 빠르게 읽을 수 없다. 자꾸 걸린다. 멈춰서서 가만히 보아야 한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 소개된 그림 가운데 고야의 <모래에 묻히는 개>라는 작품이 있다. 소품이라고 여겨질 이 그림에서 서경식은 자신을 본다. “보기에 따라서 급류를 허겁지겁 헤엄쳐 건너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유사(流砂)의 개미지옥에 삼켜져 구제불능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 개는 고야 자신이다. 하지만 그 당시에 나는, 이 개는 나라고 생각했다.” 백여 군데의 미술관을 다니면서 그가 발견하는 그림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이미지 아니었을까.

에필로그에 소개된, 외젠 뷔르낭의 <성묘로 달려가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에서도 “이 사나이들은 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무엇을 쫓고 있는가? 아니면 쫓기고 있는가? 고향에서 쫓겨난 난민인가? 혹은 괴로운 여행을 계속하는 순례자인가? 곰곰이 바라보고 있노라니, 아아, 내가 지금 꼭 이런 꼴이겠구나 하고 생각되었다”고 30대 청년 서경식은 말한다.

‘1808년 5월 3일, 쁘린씨뻬 삐오 언덕의 총살’과 ‘게르니카’에서 고통으로 가득찬 현재의 기원을 만나고, 작가 미상의 테라코타 ‘상처를 보여주는 그리스도’에서 그 상처를 헤집어 진실을 내보이는 대담함을, 헤랄드 다비드의 ‘캄비세스왕의 재판’에서 살갗을 벗겨내는 냉엄한 치열함을 만난다.

아픔의 연원을 가슴 쓰리게 확인하면서 그 실체에 한발 한발 다가서는 서경식의 유럽미술 순례는 처절한 구도행(求道行)이다. 레온 보나의 ‘화가 누이의 초상’에서 서경식은 어렵사리 ‘생활’을 재개하는 누이의 형상을 떠올리고, 부르델의 ‘빈사의 켄타우로스’에서 굳센 다짐을 얻는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나의 일과 나의 삶을 모색하는 어느 청년의 방랑기에 다름 아니다.

반면, <나의 서양음악 순례>에는 이순(耳順)의 넉넉한 지혜가 풍성하게 넘쳐 흐른다. 하모니가 풍부한 안단테 리듬의 클래식 음악을 듣는 느낌을 준다. 특히, 음악가 윤이상 이야기는 오랫동안 회자될 듯하다. 그의 육성으로 전하는 음악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아름답다.

“아버지는 밤에 가끔씩 저를 데리고 낚시를 하러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때 우리는 조용히 배를 타고 물고기가 튀어오르는 소리나 다른 어부들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흥얼거리는 노랫가락은 이 배에서 저 배로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소위 ‘남도창’이라 불리는 침울한 노래로 수면이 그 울림을 멀리 전해주었습니다. 바다는 피아노의 떨림판 같았고,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습니다.” (윤이상·루이제 린저 대담집 <상처 입은 용>)

이 책에서 우리는 40여 년 거리를 떠돌다 집으로 돌아와 삶의 기미를 귀띔하는 노년의 지혜를 만난다. 사실 그 모든 거리들이 그의 집이었으리라. 어느덧 디아스포라의 에세이스트 서경식은 61세가 되었다.

신간소개

그래도 나는 내가 좋다
안디 홀처/ 다반/ 1만3000원

7대륙의 최고봉인 세븐 서밋 가운데 6곳의 등정에 성공한 등반가 안디 홀처의 자전에세이 <그래도 나는 내가 좋다>. 선천적 시각 장애인으로 귀와 코, 입, 그리고 손만으로 세계의 정확한 그림을 그려내며 지구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들을 찾아 탐사를 떠나는 저자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쌍전
류짜이푸/ 글항아리/ 1만8000원

<쌍전>은 중국 인문학계의 거장 류짜이푸가 <삼국지>와 <수호전>의 두 경전을 정면으로 해부하고 비판한 책이다. 저자는 <삼국지>가 보여주는 권모술수 숭배현상 및 <수호전>이 보여주는 폭력숭배 현상에 주목한다. 이 책은 두 개의 경전 ‘쌍전’의 뛰어난 문학성 속에 녹아든 이러한 폭력성과 권모술수의 책략들이 지난 수백 년간 사람들의 심성에 쌓여왔음을 지적한다.

간디의 물음
나카지마 다케시/김영사/1만2000원

세상을 향한 위대하고도 숭고한 삶의 의미를 되살려낸 간디 사상서 <간디의 물음>. 현대 사회를 사는 우리가 간디의 메시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하여 살펴본 책으로, 간디 사상의 핵심만을 풀어내어 현대사회를 날카롭게 조망하고 통찰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자립을 위해, 인종차별주의에 고통 받는 인도의 민족 해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혁명가 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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