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통현의 <신화엄경론>, 지눌의 <보조법어>, 심재룡의 <지눌연구>

소종민 (공부모임 책과글·인권연대 숨 회원)

고타마 싯다르타는 기원전 563년 무렵에 태어나 기원전 483년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 사람이다. 그는 깨달아 붓다가 되었다. 제자들은 “나는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며 그의 말을 여러 편의 글로 남겨 지금까지 전해지게 하였다.

그것이 이른바 <아함경><능가경><금강경> 등의 불경(佛經)이다. 아함, 능가, 금강 등의 한자어는 중국에 불교가 유래되면서 산스크리트어로 된 말을 옮긴 것이다.


이후 1천년이 흘러 당(唐)나라의 법장(法藏, 643~712)이라는 승려는 붓다의 깨달음이 표현된 <화엄경> 해석의 최고 권위자였다. 그렇지만 법장의<화엄경> 해석에는 문제가 많았다.

그는 단지 <화엄경>이 모든 경전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하고 완전하며 최고의 깨달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다시 말해 이것은 “화엄의 가르침이 보통 사람들에게 주는 실천적인 함의보다는 그것의 심오함과 우수함을 가능한 한 강조하기 위해 노력한 것”(심재룡, <지눌연구>)이다.

따라서 법장은 <화엄오교장(華嚴五敎章)>에서 ‘완벽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빛의 세계’를 그린 ‘여래성기품(如來性起品)’을 <화엄경>의 핵심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법장의 해석에 저항하는 새로운 해석이 동시대에 등장했다. 재가불자 이통현(李通玄, 635∼730)이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을 지어 선재동자의 고행을 그린 ‘입법계품(立法界品)’을 <화엄경>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통현의 입장은 “만약 이 경전을 통하여 믿음과 궁극적 깨달음의 경지로 이끌 수 있는 범부(凡夫)가 한 명도 없다면 이 경전은 무용지물이다”는 한 마디로 집약된다. 이론적 체계에 힘쓴 법장의 태도와는 달리 이통현은 실천적 방편을 모색하는 데 더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쉽게 말하면 법장은 불교를 체계로서의 철학으로 여긴 반면, 이통현은 불교를 삶의 긴요한 지침으로 삼은 차이라고 볼 수 있다.

이로부터 500년 정도가 흐른 때에 <화엄경> 해석을 둘러싼 법장과 이통현의 차이를 선명하게 인식하며 교선일체(敎禪一體)·정혜쌍수(定慧雙樹)의 사상을 이룩한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지눌(知訥, 1158∼1210)이다.

사상적 체계를 수립하는 데 몰입한 법장의 노력은 결국 붓다를 유일신으로 만들어 온갖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여 ‘인간적 면모와 비인간적 면모를 함께 지닌 괴이한 복합체’로 만들었을 뿐이었다. 이에 맞서 이통현은 그동안의 신격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화려하고도 거추장스런 장식을 벗어버리고 ‘모든 사람은 본래 붓다[本來成佛]’임을 확증한 것이었다. 지눌은 이통현이 옳다고 생각했다.

단도직입으로 말하면, 법장에게 붓다는 고타마 싯다르타 그 사람 하나뿐이다. 이통현과 지눌에게 붓다는 바로 자신을 포함한 중생 모두이다. 예수도 그렇다. 예수는 오직 예수 한 사람뿐인가, 아니면 예수는 우리 자신인가.

불교와 크리스트교 그리고 유교 등 모든 종교가 신적 존재 또는 신(神)이라는 존재를 두고서 수없이 많은 말들을 보태오고 있다. 어떻든 ‘신’을 높은 자리에 두고서 믿음의 대상으로만 여긴다면, 믿음의 주체인 ‘인간’ 자신은 그저 낮은 자리에만 머물게 되지 않을까. 지눌과 이통현의 문제의식은 바로 그것이다. 신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이고 세상 모두라는 것.

“나는 이 <신화엄경론>에서 밝혀낸 것을 면밀히 검토하였다. 삼승(三乘)을 따르자면 열 단계를 다 거친 후에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고, 일승(一乘)을 따르자면 열 가지 믿음의 첫 단계에서 이미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단계를 말할 것 같으면, 깨달음은 초발심에 존재한다.

만약 열 가지 믿음의 초심(初心)에만 들어갈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십주(十住)의 초심에도 이를 수 있다. 만약 십주의 초심에 들어갈 수 있다면, 다시 자연스럽게 구경(究竟)의 단계에도 이를 수 있다. 이렇기 때문에 구박(具縛)의 범부(凡夫)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바르게 믿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지눌, <화엄경 절요(節要)>)

<화엄경>에 대한 이통현 해석의 중심축은 이론적 논증보다는 믿음에 있다고, 지눌은 본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르게 믿는 마음을 내는 것’이다. 바르게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계속해서 지눌은 말한다.

“법장은 여래의 국토를 인식하는 것이 지극히 어려움만을 우러러 믿고, 그의 마음이 본래의 지혜와 결과의 덕을 갖추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가 지극히 심오하여 생각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은 붓다를 그의 마음 바깥에 위치시키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니, 어찌 믿음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위의 책)

붓다를 마음 바깥에 위치시키고는 믿음이란 없다. 붓다를 내 마음 안으로 통째 들여와야만 한다. 아니, 이미 붓다는 내 마음 안에 있다. 아니다, 그냥 붓다는 나다, 그리고 당신이고 우리들이고 세상만물 모두이다. 믿음을 일으키는 것[起信]은, 곧 자기 본성을 깨닫는 것[性起]이다.

그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사는 것과 죽는 것에 자유롭다. 결국 지눌과 이통현은 무엇이든 분별하여 체계적으로 논증하려는 태도, 깨달음 자체를 대상화하고 지연시키는 일에 맞서서 지금 바로 통째로 진심(眞心)으로 서는 것, 즉 생사(生死)에 묶여 있는 내 자신의 모습 전체를 곧바로 꿰뚫어보라고 역설한다. 추론보다는 직관이다. 모두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 무상(無常)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신간소개

프레임은 어떻게 사회를 움직이는가
이동훈, 김원용/ 삼성경제연구소/ 1만5000원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책은 우리 사회의 현안들에 대한 개인의 사회적 해석과 판단이 이루어지고 이것들이 모여 다수의 의견으로 응집되어가는 과정을 프레임 현상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환경이 변한 만큼 프레임이 가진 정치사회적 영향력과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도 예전과는 달라졌다.

현혹과 기만
피터 포브스/ 까치/ 2만원

의태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생물들의 다양한 모습과 그것을 연구한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현혹과 기만>. 의태와 위장을 20세기의 미술, 문학, 군사, 전술, 치료법과 연관 지어 그것이 진화와 창조론 사이에 계속 벌어지는 논쟁과 맺는 복잡한 관계를 살펴본 책이다. 1850년대 헨리 월터 베이츠와 앨프리드 러셀 윌리스라는 두 자연사학자가 아마존 우림에서 의태 현상을 발견한 것을 시작으로 21세기의 현대장비와 컴퓨터 분석을 이용하나 오늘날의 연구에 이르기까지 의태와 의장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과학으로 풀어보는 음악의 비밀
존 파웰/ 뮤진트리/ 1만5800원

베토벤에서 비틀스까지, 물리학과 심리학을 넘나들며 재미있게 풀어보는 음악의 수수께끼 <과학으로 풀어보는 음악의 비밀>. 과학자이자 음악가인 저자는 이 책에서 여러 가지 과학적인 궁금증을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면서, 매혹적인 음악의 세계로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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