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정국 초반 각종 여론조사에서 열린우리당이 전국 어디랄것도 없이 압도적으로 앞서자 등장한 말이 거여견제다. 한나라당 등 야당이 다시 공세를 펴며 기세를 올리자 선거를 일주일도 안 남긴 요즘엔 반대로 거야견제론이 고개를 든다. 의미는 정 반대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둘다 대통령 탄핵이 가져 다 준 일종의 '인식의 부산물'들이다.

어차피 국회의원 선거는 머릿수 싸움이다. 집권당의 입장에선 다수의석은 곧 지상과제일 수 밖에 없고, 야당 역시 머릿수를 늘리기 위해 안간힘이다. 말이야 여야균형, 다시 말해 여당과 야당이 골고루 의석을 차지하는 이른바 '황금분할'이 국회 원구성의 최고 선으로 치부되지만 이는 이상론에 불과하다. 여야의 숫자가 엇비슷하면 되레 국회는 바람잘날이 없다. 정권이 순항하기 위해선 집권당은 반드시 다수의석을 차지해야만 한다. 결과론이지만 대통령탄핵이라는 초유의 국회쿠데타는 야당의 다수의석이 결정적 빌미가 됐다.

냉정하게 보면 거여와 거야는 둘다 순기능적인 면이 있다. 거여현상은 정권의 도덕성여부를 떠나 일단 특정 정권이 순항할 수 있는 배경이 된다. 과거 군사정권이나 권위주의 정권 때는 사실 문제의 거여현상이 역사와 국가정체성을 왜곡한 원흉이었지만 어쨌든 통치자는 이에 기대어 적어도 자기 집권기는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정치가 그야말로 명쾌한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민주국가에선 거여현상은 차라리 권장될 필요도 있다. 바람직한 통치자가 합목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굳이 야당의 딴죽에 신경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국가적으로 어지러운 상황에서 어느 혜성과같이 나타난 통치자가 나라를 가장 민주화된 국가로 끌고 가는 과정이라면 이런 거여현상은 특히 불감청이지만 고소원인 것이다. 일부 노무현정권 지지자들이 이점을 내세우며 지금 유권자의 거여견제심리는 착각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현재의 국가적 상황이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큼 정치의식의 선진화에 놓여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멀쩡한 대통령이 청와대에 유폐될 정도면 과거 권위주의 시대와는 분명 다르긴 다르다. 때문에 다가오는 총선을 통해 국민들이 거여국회를 만들어주는 것도 마냥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거야현상 역시 좋은 점이 있다. 우리는 역시 지난 굴절된 역사에서 이를 분명히 확인했던 것이다. 군사정권이 모든 것을 힘으로 밀어부칠 때 그래도 이에 견제가 되었던 건 '힘있는 야당'이었고, 야당의 힘은 궁극적으로 국회의원 머릿수였다. 지금은 지역감정의 굴레가 씌워져 일부 폄하되는 부분도 있지만 그 당시 막대기만 꽂아도 저절로 국회의원 배지가 달리던 '호남정서'는 이런 점에서 정치발전에 기여한 측면이 크다. 이 때 야당 텃밭의 '호남'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역사는 또 어떻게 변질됐을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 우리나라 정치가 거야국회가 필요할 정도로 잘못가고 있는지는 역시 판단을 미루고 싶다. 다만 의회쿠데타를 주도한 수구세력을 모조리 떨어뜨려도 시원찮을 마당에 그 주도세력 집단에 대해 동정론이 인다는 것은 걱정스러운게 사실이다.

야당이 주장하는 열린우리당의 1당 독재론은 논리보다는 아직 정서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 TV에서 눈물을 짓고, 일보삼배에 휠체어로 '감성정치'를 부추기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일당독재론이 정치적 역학관계의 모든 '콘텐츠'를 감안한 주장이라면 설득력을 갖겠지만, 위기상황에서 단순한 숫자적 개념만으로만 이를 부추긴다면 국민들에게 절대 먹힐 수가 없다.

차라리 거여견제 심리가 열린우리당의 후보자질에서 비롯됐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한 때 잘 나간다고 해서 되나가나 사람들을 영입하고, 결코 개혁적이지 못한 인사를 후보로 내세우고도 다수당을 기대하는 우리당의 오만을 냉정하게 심판한다면 당초 우려됐던 무조건적인(?) '거여국회'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감성이 아닌,철저하게 논리와 이성을 갖고 각 당의 '반칙'을 응징해야만 17대 국회는 국민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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