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오라기 비단물결이 차령산맥의 아랫도리를 축축히 적시며 봄을 재촉한다. 신라와 백제의 접경인 금강(錦江) 언저리에서 어깨를 엇비키며 솟아있는 산봉우리엔 봄바람이 찾아들고, 겨우내 분을 삭이던 진달래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붉은 울음을 터트린다.

옥천의 구진벼루에서, 황산 벌에서, 숨을 거둔 백제 병사의 넋이 진달래 꽃으로 되 피어 난 것일까. 서기 660년에 마침표를 찍은 백제 왕국이나 봄꽃은 그 산하에 어김없이 피어나고 산성은 산맥을 따라 이어달리기를 계속하고 있으니 두보(杜甫)의 시구(詩句:춘망)대로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를 다시금 느끼게 된다.

신탄진을 건너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 산림욕장으로 들어서면 계족산(鷄足山) 정상을 에워싸고 있는 계족산성이 역사의 파수꾼인양 속세를 굽어본다. 산마루에 마련된 봉황정에서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7백m 쯤 올라가면 산정수리에다 머리띠를 두른 듯한 계족 산성이 역사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

산 중턱에서 눈 들어 정상을 바라보면 언뜻 ‘테뫼식 산성’으로 보여지나 정상에 오르면 넓은 계곡을 감싸고 있는 포곡식(包谷式) 산성임을 금세 알 수 있다. 겉모양으로 보아 산성은 ‘테뫼식’과 ‘포곡식’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운동선수가 이마에 머리띠를 두른 듯 산정수리를 감싸는 산성이고 후자는 계곡을 둘러싸는 산성이다.

일반적으로 포곡식 산성이 테뫼식 산성 보다 규모가 훨씬 큰데 곳에 따라서는 두 양식을 모두 갖춘 산성도 발견된다. 해발 423.6m의 계족 산성은 테뫼식으로 혼동하기 쉬운 산성이다.산세가 닭의 발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혹자는 봉황산(鳳凰山)으로 높여 부르기도 한다. 충주에도 계족산이 있는데 지방 유지들의 제안으로 계명산(鷄鳴山)으로 바꿔 부르고 있다.

둘레 1037m, 높이 7~10.5m, 폭 3.7m에 달하는 계족 산성은 비교적 큰 산성에 속한다. 북쪽벽은 바위돌 만한 석재가 내외협축(안과 밖에서 함께 돌로 쌓음)으로 축성돼 있고 구간에 따라 판암 계통으로 협축과 내탁(밖은 돌, 안은 흙, 자갈로 채워 다짐)을 겸하였다.

성안에서는 우물터가 발굴되었고 이곳에서는 신라계통의 굽다리 토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지금까지는 백제계열의 산성으로 알아왔는데 왜 신라적인 요소가 발견되는 것일까. 그것은 접경지대이기 때문이다. 성이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이고 차지한 집단이 필요에 따라 증개축을 해왔던 것이다.

계족산성에서 사방을 바라다보면 시야가 확 트인다. 동쪽으로는 대청호가 넘실거리고 서쪽으로는 계룡산이, 남쪽으로는 식장산, 보문산이 손 끝에 와 닿는다. 대청호의 푸른 물결이 넘쳐 계족산성 안으로 흘러들지 않을까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계족산성을 중심으로 하여 인근에는 30여개의 산성이 릴레이를 하고 있다. 계족산성 능선을 따라 이현동 산성, 장동 산성, 노고산성, 견두산성, 갈현성 등이 신라와의 길목을 차단하고 있다.

조선시대, 계족산 봉수대는 충남북을 잇는 통신의 징검다리였다. 이곳에서 문의 소이산으로 봉수를 전하고 다시 청주 것대산으로 횃불을 옮겼다. 금강가의 작은 포구였던 신탄진은 거대 도시로 돌변했고 지금 그곳에서는 벚꽃잔치가 한창이다. 역사는 변해도 피고 지는 꽃과 들풀은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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