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휘날리며’와 기억의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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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휘날리며’와 기억의 치유
  • 충청리뷰
  • 승인 2004.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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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규(청주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바쁜 시간을 할애하여 스크린 앞에 앉았다. 강제규 감독의 ‘태극기 휘날리며’가 한국영화사의 각종 기록을 갱신하는 이유를 확인하고 싶어서다. 이 영화가 현대 민족사를 굴절시킨 최대 사건인 한국전쟁을 소재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호기심이 생겼다.

전후 세대인 필자에게 6.25는 체험적 현실이 아니라 선대(先代)가 주입한 관념적 역사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기억의 파편들은 모두가 반공주의라는 견고한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석된 과거는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오던 날을…”로 시작하는 노래 가사처럼 원수에 대한 공포와 분노, 적의와 복수심을 마음껏 증폭시켰다.

천만 이상을 빨아들이고도 또 다시 많은 사람들을 흡입하는 블록버스터에서 필자는 지독한 편향성으로 중독된 기존 해석이 아닌 새로운 뭔가를 기대했다. 영화는 이런 나의 기대를 읽고 있는 듯하였다. 스크린은 처음부터 민족이니, 통일이니, 이즘과 같은 전쟁 해석과 관련된 기존의 거대 서사들에는 관심이 없다. 철저히 그리고 아주 지독하게, 전쟁이라는 집단 광기의 현실 하에서 묻혀질 수밖에 없는 개인의 소리를 복원하고 있다. 그것도 추상화되고 복수화된 개인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두 형제-진태와 진석이 잘 생긴 배우라는 사실만이 영화의 리얼리티를 손상시킨다-의 시선을 포착하고 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후에 가족의 안위를 책임져야 하는 장남 진태에게 6.25 전쟁은 동생을 구출하여 어머니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구조 작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지극히 개인적인 전쟁에 대한 의미 이해는 진태를 우(태극 무궁 훈장의 주인공)에서 좌(깃발 부대의 간부)로 거침없이 변모시킨다. 그리고, 동생을 무사히 사지에서 살려 보내기 위해 다시 깃발 부대를 향해서 기관총을 퍼붓는, 죽음으로 이르는 변신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전쟁에 대한 이와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은 진태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형의 표독한 살육 행위를 만류하는 진석을 비롯하여 스크린에 그려지는 대부분의 인물들도 그들이 처한 지극히 개인적인 사회적 위치에 의거하여 전쟁을 해석하고 반응한다.

필자가 이 영화를 소중히 그리고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바로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전쟁에 대한 기억 때문이다. 냉전이니, 분단이니, 좌우 대립 등과 같은 거대 서사가 가려버린 목소리, 시대 질곡 속에서 억압되고 배제되었던 개개인의 목소리에 주목하고 그 목소리의 다성성(multivocality)을 살려내는데 영화는 일조를 하고 있다. 최소한 그런 문제 의식을 영화의 배경에 깔고 있다고 필자는 생각했다. 사실 이런 전쟁 회상법은 최근 몇몇 연구에서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소장학자 윤택림은 「인류학자의 과거여행 ­ 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란 책에서 충남의 어느 마을 사람들에 대한 구술사 연구를 통해 이 마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있는 전쟁은 북한 사람들과의 전쟁이 아니라 마을사람들 간의 전쟁이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동시에 윤택림은 이 마을의 세 여성을 대상으로 한 구술 증언을 통해서 한국 전쟁이 이들에게 극단적 가족해체와 계층적 하락의 고통스런 기억이었음을 밝혀내고 있다.

이렇게 묻혀져 있던 기억을 꺼내고 새롭게 이야기해야 할 필요가 무엇인가? 사실 과거의 역사는 그것을 경험한 세대나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나 동일하게 기억으로서 재구성되는 역사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은 우리가 어떤 기억들을 재생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6.25를 일방적인 가해와 일방적인 피해의 역사로 회상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획일화에 의해서 강요된 반쪽의 기억’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강제되는 왜곡된 기억은 포성이 멈춘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억압과 증오의 폭력만을 재생산하게 만든다. 지금도 선거 때마다 복권되는 색깔론의 그 질긴 망령들이 어떤 효과를 지향하는지를 생각해 보라. 억압되고 금지된 기억들을 재생하는 것, 모두가 피해자일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울음을 울리게 하는 것, 그리고, 그 무수한 기억들을 어루만지고 위무하여 화해와 치유의 새로운 기억이 싹트게 하는 일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분열과 반목과 침묵과 억압을 강제하던 반쪽짜리 기억을 걷어치우고 고침과 용서와 화해와 대동(大同)을 가능케 하는 기억의 치유(healing of memory)가 요구되는 시점에 우리는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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