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동 316번지 사람들, “빨래 널 때도 고개를 숙였다”
일상을 송두리째 뺏은 공간, 누군가에겐 자랑스런 직장

옛 국정원과 기무사를 돌아보다
같은 공간 서로 다른 기억

옛 국정원을 놓고 한 때 미술관, 문학관, 공원 등 많은 계획들이 세워졌다. 최근에는 공연장 건립계획이 가시화됐지만 아직까지 확정된 것은 없다. 옛 국정원은 2000년에 청주시가 37억원을 주고 매입했다. 청주시는 다만 올해 유휴공간 가운데 옛 KBS청주방송부지에 48억원을 들여 시립미술관으로서의 구체적인 실시설계 용역을 마친 후, 2014년 개관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유휴의 시간’을 품고 있는 공간에 대한 기억은 제각각이다. 누군가에겐 동네 지척에 있지만 한번도 가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곳이고, 누군가에겐 고문 받았던 끔찍한 기억의 장소이다. 또 누군가에겐 자랑스러운 직장이었다. 국정원과 기무사의 역사를 관통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옛 국정원 전경.

“뭐든 빨리 들어와 동네가 환해졌으면”
사직동 316번지에 만난 세 할머니

사직동 옛 국정원으로 올라가는 골목 사이 낡은 주택들이 옹기종기 붙어있다. 이들은 40년 넘게 이곳에 살았지만 국정원을 한번도 ‘구경’하지 못했다. 기자가 국정원을 취재하고 있다고 초인종을 누르자 얼마 뒤 이동림(81)· 이영숙(77)· 심재각(77)할머니는 옷을 단단히 차려입고 문을 나섰다. “국정원 문이 열렸다면서? 40년 동안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었는데 한번 같이 가봅시다.”

왼쪽부터 이영숙· 심재각· 이동림 할머니는 국정원이 있는 동네에서 40년 넘게 산 토박이다. 그렇지만 무서워서 국정원 쪽으론 빨래도 제대로 널지 못한 시절이 있었다. 이들이 기억하고 있는 국정원은 어떤 곳일까. / 사진 육성준 기자

이동림 할머니는 “73년에 이사를 왔지. 75년에 국정원에서 김장을 해달라고 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봤어. 동네 사람들 10명 정도 함께 김장을 했는데, 국정원 측에서 고맙다고 ‘고무장갑’과 최전방 여행을 시켜줬지”라고 말했다.

사직동 316번지 31가구는 한 때 청주시내에서 가장 잘나가는 동네였다. 70년에 주택은행에서 집을 지어 분양했는데 당시 목돈 90만원에 융자 90만원을 끼고 살았다. 교수와 교사들이 많이 살았는데 위치가 좋다보니 아직까지 떠나지 못한 원주민들이 지금은 11가구 정도다.

이영숙 할머니는 “청주시내 제일 좋은 양옥집이었는데 지금은 달동네가 돼버렸어. 국정원 건물 떠나고 고양이새끼들이 많이 산다고 하더라고. 그런지 동네에 고양이들이 많아. 고양이 밥 주는 재미로 살아”라며 웃었다. 이영숙 할머니네 집 옥상에 올라가면 국정원 정문이 보였다. “국정원에서 빨래 널 때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어. 1년에 한번 씩 신원조사도 꼬박꼬박 했지. 이사 가기 전까지 그랬어. 아마 우리집이 동네 사랑방이어서 그런 것 같아.”

그래도 대문을 안 잠그고 다녀도 한 번도 도둑이 들지 않았던 것은, 다 국정원 덕분이라고 했다. 심재각 할머니는 “국정원에 들어가면 다 죽어서 나온다고 했지. 옛날에 아랫동네 살던 박순경이라고 있었는데 글쎄 국정원에 다니는 사람을 모르고 신원조회를 했다가 잡혀 들어가 반병신이 됐지. 그 얘기가 한참 떠돌아서 동네사람들은 국정원 근처를 얼씬도 하지 않았어”라고 기억했다. 할머니들은 “김현수 시장 때 국정원 건물 산거 아녀. 미술관이든, 도서관이든, 공원이든 뭐가 하루빨리 들어와 동네가 좀 환해졌으면 좋겠어”라고 한목소리를 냈다.

옛 국정원 주변 마을.

“기무사는 전공, 국정원은 부전공”
김재수 우진교통 대표이사

김재수 우진교통 대표이사에게 기무사와 국정원은 청춘을 관통하는 상처의 공간이다. 그는 농담처럼 기무사는 전공, 국정원은 부전공이었다고 한다.

▲ 김재수 우진교통 대표이사
“일상을 덮쳤다”고 말하는 그는 80년대 기무사에서 6~7번, 국정원은 1번 조사를 받았다. “80년 전두환 정권의 게엄선포를 반대하다가 학생신분으로 처음 기무사에 끌려갔다. 2~3주 동안 지하실에서 구타와 고문을 당하고 신문지 2장을 덮고 잠을 잤다. 이후 대전교도소로 강제징집을 당해 화천에서 군 근무를 했는데 화천지역 기무사에서 이른바 사상교육을 받고 간신히 ‘합격’판정을 받고 풀려났다. 불합격 판정을 받으면 의문사를 당해도 모를 시대였다.”

군대에서 휴가를 나와도 휴가 중 있었던 일들을 당시 개신동에 있던 기무사와 화전기무사에 일일이 보고를 해야 했다. 80년 5월 17일 전국으로 게엄이 확대되면서 민간인들도 기무사에서 조사를 받았다.

86년엔 충북민주화운동협의회 사무국장 신분으로 국정원에 들어갔다. “선배민주화운동 그룹은 주로 기무사에서 후배그룹은 도경 산하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았다.” 대공분실은 경찰이 조사권을 갖고 있으며, 지금의 이마트 자리에 있다가 이사갔다. 대공분실은 물고문 장치가 있었다.

그는 “우리지역은 시대적인 사건에 국정원이 직접적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기무사도 자리를 여러 번 옮겼고, 대공분실도 마찬가지다. 기무사는 87년 이후 소멸과정에 있다 보니 지역적인 영향력이 크지 않다”며 “문화공간으로 바꾸는 것은 좋지만 기무사가 여성친화공원과 어떠한 연결고리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문화공간이라면 역사성을 살려야 하는데 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나 민주화 운동과 연관된 공간이 마련돼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정원과 기무사에 대해 “도심에서 공간이 외부로 빠져나갔다. 국정원과 기무사 모두 음지 속에서 일하고 있는 것 아니냐. 군사문화의 잔재들이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군이 존재하는 한 기무사는 필요하다”
기무사에서 34년 근무한 김아무개씨

그는 28대 1의 경쟁률의 뚫고 기무사 부사관에 뽑혔다. 34년 근무하고 준위로 전역했다. 김아무개씨는 이름과 나이를 밝히기를 꺼렸다.

그는 “2006년 12월 공군사관학교로 건물을 신축해 기무사가 이사 간 뒤 부분적으로 지역민들에게 공간을 개방했다”며 “이사 이후에도 기무사측에 허락을 맡아 3년 전부터 건물 관리를 해왔다”고 했다. 우범지대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방범을 꾸준히 해왔던 것이다. 김씨는 “기무사가 지역주민의 여론을 받아들여 문화공간이 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했다. “병사들이 있다 보니 목욕탕이 있었는데 이번에 다 철거됐다. 그걸 활용하면 좋을 텐데 왜 없앴는지 아쉽다. 도로도 원래 부대에 들어오기 위한 진입도로였는데 2000년에 시민들에게 개방한 것이다.”

기무사는 현재 주성중학교 옆 청주시상당보건소에서 82년에 개신동 부지로 이사를 왔으며, 2006년 12월 공군사관학교 안으로 또 다시 자리를 옮겼다. 김씨는 “기무사는 첩보와 자료를 수집하고 군과 관련한 대간첩, 대테러 사항에 대해 조사·색출한다. 시민들은 기무사가 민간인을 잡아서 조사한다는 데 다 오해다”고 강조했다.

기무사 폐지 여론에 대해 그는 “대통령 선거 때 ‘기무사 폐지’를 들고 나오는 후보도 있지만 군이 있는 한 기무사의 존재는 필요하다. 근무인원이 줄어 기본적인 사무나 청소 등을 간부들이 나서서 할 정도”라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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