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영 사회문화부 차장

굳게 잠긴 자물쇠를 열고 옛 국정원 내부를 둘러봤다. 꼼꼼히 건물을 살피면서 작은 흔적이라도 찾으려고 눈을 반짝거린다.

이처럼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공간을 만날 때면 묘한 설레임마저 느껴진다. 면회실 건물에서는 낡은 정물화가 보이고, 체력단련실 팻말이 붙은 문도 열어본다.

어딘가에 전기고문기계나 물고문기계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작은 쇠붙이라도 발견하고 싶어 묵은 먼지 속을 헤쳐 나가다 그리스에서 88서울올림픽을 위해 성화를 채집하고 있는 낡은 사진을 발견한다.

88년도, 그 해 여름은 올림픽으로 뜨거웠다. 86년엔 아시안게임. 난 초등학교 2학년과 4학년이었다. 하숙하던 대학생 오빠는 호돌이를 286컴퓨터로 프린트해서 선물로 줬다. 그렇다. 책받침에도 연필에도 공책에도 호돌이 호순이는 웃고 있었다. 아직도 굴렁쇠를 굴리던 소년의 모습을 기억하는 세대다. 서른이 넘어 옛 국정원의 문을 따고 들어가 보지만 내겐 구체적인 기억이 없다. 수북한 먼지와 낡은 문, 내다버린 집기뿐이다.

옛 국정원에 대한 기억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저장돼 있다.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각인된 이미지와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어떻게 가공해낼 것인가는 지금 기성세대의 숙제다.

옛 기무사도 마찬가지다. 옛 기무사는 1982년 개신동 부지로 이사를 와 2006년 그곳을 떠났다. 옛 국정원과 옛 기무사 모두 도심에서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음지로 점차 숨어들고 있는 것이 그들의 모양새다.

옛 국정원 인근에 살고 있는 사직동 316번지 사람들을 취재했다. 옛 국정원 올라가는 길이 무서워 대문을 열면 지척인데도 40년 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얘기에 그들이 가졌던 권력의 힘을 짐작해본다. 군사정권이 가졌던 무시무시한 권력 때문에 청춘을 저당 잡힌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러한 직장이 ‘자랑’이었던 퇴직한 준위도 있다.

유휴공간이 갖고 있는 힘은 ‘시간’이다. 버려둔 시간을 어떻게 정리해내느냐가 관건이다. 유럽의 문화공간들은 유휴공간을 리모델링하기에 앞서 공간의 ‘역사적인 가치’를 먼저 따진다. 그곳이 무기 공장이든, 제분소든, 화약 공장이든 간에 그 가치를 보존해 미래세대에게 무엇을 전해줄 수 있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옛 기무사와 옛 국정원, 그리고 KBS청주방송과 옛 연초제조창 부지도 그럴듯한 공간계획에 앞서 역사적인 가치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 역사적인 가치가 없다면 굳이 낡은 건물을 리모델링할 이유가 없다.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 비용을 오히려 절감할 수 있다. 또 신축건물이 갖는 새로움으로 관광객을 더 이끌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스토리텔링이라고 해도 좋다.

청주시의 유휴공간을 보는 행정의 틀이 먼저 바뀌어야 한다. 지역민과 기억을 끄집어내 포장해도 좋고, 최소한의 기록도 좋다. 그러한 장치를 만들지 않고 “예전에 이곳이 000곳이야” 그 한마디만을 남기는 유휴공간 리모델링은 실패사례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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