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땀으로 역사를 끌고 온 사람들 - 충북 민주화운동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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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땀으로 역사를 끌고 온 사람들 - 충북 민주화운동 재조명
  • 권혁상 기자
  • 승인 2002.02.09 18: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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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내 민주화 보상법 신청자 249명, 보상 회의감 신청거부자 더 많아

지난 99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등에 관한 법'(이하 민주화보상법)이 제정된 뒤 충북도청 민원실에 접수된 심의신청 건수는 249건이다. 2000년 8월부터 실시한 1차 신청에 184명이 접수했고 지난해 마감한 2차 신청에는 추가로 65명이 참여했다. 하지만 구금, 강제징집, 행방불명, 상이 후유증 유죄판결, 해직 등의 사유로 제한해 아예 신청을 포기한 경우도 있고 보상자체에 대한 회의감으로 신청을 거부한 관련자들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독재와 반민주의 진흙구덩에 빠진 역사의 수레바퀴를 피와 땀으로 끌고온 지역의 민주화운동 활동가들의 면면을 알아본다. 5공말부터 6공 초기까지의 지역 민주화운동 약사는청주(KYC) 이광희대표의 옥고를 받아 전재했다. 또한 본문기사는 충북대 지역사회연구소가 지난 99년 발간한 '충북지역 사회연구'(제8집)의 내용을 상당부분 인용했음을 밝혀둔다. 이번 기사에 미처 소개되지 못한 민주화운동 활동가들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더 알찬 지면으로 만나보기로 한다.
(편집자 주)

충북지역 민주화운동

1. 시작하기 전에 당부 드리는 말씀
먼저 이 글은 충북지역의 87년을 전후한 시기를 중심으로 대략 90년대 중반까지 생각나는 대로 기술했 다는 점에서 충북 지역 재야민주화운동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거나 함축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을 밝혀둡니다.

각 부문과 영역별로 자세한 내용들을 기록하기 곤란해 주로 대표적인 단체 결성을 중심으로 기술하였습니다. 더욱 많은 내용과 세세한 부분은 추후 연구를 통해 논의되기 바랍니다. 원고청탁을 받으면서 개인적으로 꼭 한번 거론했으면 좋겠다는 당위와, 한편으로 내가 얼마나 지난 시기의 독재와 폭압을 뚫고 역사의 전진을 이룩한 사람들을 좀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이렇게나마 지난 시기를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던 분들이 있었기에 이많큼의 진보라도 가져올 수 있었다는 점을 밝혀야 다음 분들이 더욱 자세하고 중요한 부분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용기를 내게 되었음을 밝힙니다.

2. 87년 이전의 민주화 운동
충북지역의 민주화 운동은 70년대 초반 도시산업선교회(정진동 목사)를 필두로 기청충북연합회가 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도시산업선교회는 신흥제분등의 부당노동행위에 맞선 투쟁으로 이후 지역내 여러 사업장의 노동조합결성운동과 빈민운동을 주도해왔습니다.

한편 기청련은 이후 소그룹 독서회활동(77년)과 EYC(79년)준비모임, 충북대 등의 미래문제연구회, 국제문화연구회, 상록수등을 통해 지역내 학생운동과 청년운동의 기초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 후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은 우리 지역에도 민주화운동의 기폭역할을 하면서 이후 우리지역 부문운동의 단초가 될 "우리춤연구회"(강혜숙, 오세란 등), 분단시대 동인(도종환, 김창규 등), 기독교 농민회, 기청협등이 속속 결성되고 학생운동으로는 5월에 충북대(정지성, 민봉규, 김재수, 김형근, 이승원), 청주대(김용명, 김병일 등), 서원대를 중심으로 최초의 3개 대학 연합가두시위가 이루어지게 되면서 민주화운동의 실질적인 활동이 시작됩니다.

이러한 학생운동은 이후 총학생회 부활을 위한 학원자주화추진위원회로 이어지게 되며, 80년이후 81년의 김성구, 이승원(충북대)등이 함석헌선섕 강연회에서 구호와 유인물을 뿌리다가 구속, 82년의 구자행(충북대),83년 오동균(청대)등이 유인물을 뿌리다 구속 되는 등 지속적인 소규모의 활동과 소모임등을 통해 그 활동 반경을 넓혀가게 됩니다.

이같은 활동의 결과는 85년 4월 15일 충북민주운동 협의회(이하 민협)가 창립되면서 더욱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활동으로 전두환정권과 정면충돌하게 되며 87년의 6월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호헌철폐특 위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이하 국본)를 구성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되어 87년 6월 항쟁을 승리로 이끄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3. 87년 6월항쟁과 그 이후 민주화운동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사무국장 정지성)는 당시의 호헌철폐와 직선제 쟁취라는 목표아래 재야와 야당을 아우르는 범민주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전국적 동시다발 시위를 가능케 하였습니다.
충북에서의 6월 항쟁은 충북대 총학생회(박영호, 이광희)선거에서 승리한 학생들이 기세를 몰아 가두로 진출하고 이에 국본의 총괄지휘로 6월 10일부터 거의 매일 가두시위를 이어가게 되면서 6.29선언을 이끌어내는 기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6월 항쟁의 성과는 당장의 조직적확대와 시민들의 폭넓은 참여로 이어졌으며 당시 민협의 가입단체들은 청주 도시산업선교회,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 기청협, 가대연, 청주지역민주청년연합, 재경충북민주항우회, 충북문화운동단체협의회, 충주지역, 재야인사, 노동현장의 비공개조직, 학섕조직 등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성과도 87년 김영삼과 김대중, 양김씨의 후보단일화 실패와 백기완선거대책본부등으로 운동진영이 사분오열되면서 깊은 분열의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혼돈의 상황속에서도 부문조직들의 결성과 조직확대는 지속적으로 되었으며, 87년 충대혐(이후 충북대협 의장 박영호-충북대), 87년 11월 민주교육추진 충북교사협의회(고흥수, 이후 89년전국교직원노조 충북지부),87년 12월 충북문화운동연합(우리춤연구회, 분단시대동인, 지역 내 화가, 대학 내 예술관련 소모임 등, 초대 공동대표는 강혜숙, 도종환, 이철수) 88년 청주지역민주청년연합(김성구),89년 충북여성민우회(공동대표 정진경, 변지숙), 그 외 목회자 정의평화 실천협의회등이 속속 결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성과는 이후 98년의 충북민족민주운동연합으로 재편되면서 당시 민중당(김재수)등의 민중민주운동계열까지 포괄하는 명실상부한 단일 전선체가 만들어지면서 지역운동진영의 단결을 도모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부문운동과 기층운동의 발전을 통해 이룬 민주대연합에 근거한 반합법적 전선체 중심의 통일단결이었습니다.

이후 91년도 12월의 충북연합(민주주의 민족통일 충북연합)은 앞서 창립한 단체 이외에 기층조직인 전농충북 도연맹(장문식), 교직원노조(권영국), 충주중원연합, 청주노동상담소(사무국장 이주형), 등이 참가하여 명실상부한 지역내 운동단체의 총 집결체가 되었으며 지역내 민주화운동의 영역을 민중운동의 영역까지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 이후 운동의 분화와 발전
이러한 민주화운동의 성과는 전농충북도연맹, 민주노총 등의 민중운동의 발전을 이루게 되었으며 90년대 초반 부터 청주시민회, 충북환경련, 청주경실련 등의 시민운동으로 이어져 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운동의 연속성에 있어서는 시민운동과의 거리는 있지만 현재 시민운동의 중요한 인적토대는 과거 민주화운동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87년을 전후한 충북지역 내 민주화운동을 약술하면서 단체중심의 나열 정도에 그친 것이 대단히 아쉽습니다. 그 과정에서 불철주야 노력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이많큼이나마 시민들의 권리를 찾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조차 없던 수많은 투쟁속에서 구속되고 사망에 이르기까지 했었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많은 이들이 기억했으면 합니다.

지난해 "민주화 보상법"의 시행과정에서 지역에서는 100여명이 넘는 분들이 민주화 보상대상자로 선정 되었지만 필자가 추측하기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이 여전히 민주화 보상신청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많은 연구와 노력으로 이땅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온 사실들이 밝혀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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