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시인, 평양 8ㆍ15민족통일대축전 행사 참석하고 귀환

도종환 시인(진천 덕산중교사)은 지난 15일,21일까지 평양에 있었다.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리며 톱뉴스가 된 평양 8ㆍ15 민족통일대축전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기 몇분 전, 인천이 아니라 김포공항으로 돌아가 착륙한다는 방송을 듣고 공항에 내리니 우익단체에서는 ‘평양으로 돌아가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전투경찰 2500명이 깔려 있는 등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였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 21일 김포공항혜서는 평양 8 · 15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고 돌아온 남측대표단이 귀환하자 한바탕 난리법석이 벌어졌다. 한쪽에서는 한총련소속 대학생들이 한반도기를 손에 들고 환영행사를 하고 다른쪽에서는 재향군인회 등의 단체관련자들이 방북을 승인한 정부당국의 사과를 요구하며 항의시위를 벌였다.

"평양은 지금 절대빈곤기, 아이들 얼굴보고 눈물이 났다'

“남과 북 모두 경직돼 있어"

"6 · 15 공동선언의 합의 정신을 지켜나가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문제가 된다. 민간차원에서 광범위하게 교류를 해나가자는 것이 기본원칙인데 현재 남과 북 양측 모두가 경직돼 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으로 국가보안법에 걸리지 않는게 없을 정도다. " 따라서 도시인은 남과 북의 민간교류 확대라는 큰 틀에서 통일대축전에 참가했으나 돌아와서는 실정법에 저촉이 되느냐 안되느냐로 일대 논란을 벌이고 있는점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정희성 · 김준태 시인 등과 함께 민족문학작가회의 추천으로 평양에 간 그는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사료 전시회와 백두산 시낭송회에 공식적으로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시낭송회에서도 문제가 생겼다. 남북화합을 주장하는 도시인의 시에 대해 북측이 ‘마음에 안든다’며 트집을 잡는 바람에 행사 자체가 무산되고 만 것이다.

“시를 선별해서 어떤 것은 되고 어떤 것은 안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항의했다. 그렇지않은가. 이런 문제로 다투면 앞으로 무엇을 할수 있겠는가. 그랬더니 북측에서 공식 사과를 해오며 문인들을 만나게해주었다.

벽초문학제, 생가보존운동 전해

그래서 그는 일생 일대의 반가운 손님, 벽초 홍명희 손자인 홍석중(61 · 소설가)씨를 만난다.
유명한 소설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홍씨는 자신의 할아버지가 쓴 대작 <임꺽정>을 1권으로 요약해 아동용<임꺽정>을 북에서 펴낸인물. 그에게 충북민예총이 해오고 있는 벽초문학제와 문학비 건립. 생가보존 운동을 전하자 매우 고마워 하더라는 것이 도시인의 말이다.

홍씨는 또 할아버지인 벽초도 그랬지만 그의 아버지인 홍기문도 세상을 떠날 때 자손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는 것을 똑같이 유언으로 남겼다고 말했다는 것.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가 정지용 시인의 최후를 증언하는사람을 만나고 온 것이다.

 ‘활북측문인대표 조정호씨가 ‘정지용 시인과 한국전쟁 중에 피난을 가다 정지용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말을 석인혜라는 수필가가 자주했다’고 증언했다. 그동안 정시인에 대해 월북, 납북. 병사, 혹은 포로수용소에서 죽었다는 설이 분분했는데 이 소식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한편 이번 통일대축전에서는 몇가지 성과가 있었다.

수첩을 펴들며 메모해온 사실을 꼼꼼이 알려주는 도시인은 “종교기념일 상호방문, 남북여성 통일대토론회, 단군의 얼과 민족통일에 대한모임, 일본 역사교과저 왜곡과 신사참배 문제를 남과 북 · 중국이 개최하는 국제회의 개최 등을 비롯해 내년 6 · 15 행사는 제주도에서 하고 8 · 15 통일대축전은 서울과 평양에서 하는 것을 논의했다·`며 이런 결과물들이 국가보안법시비에 가려진 것을 안타까워 했다.

북측인사에 대한 정보 너무없다.

만경대 방명록 사건에 대해 그는 남측 대표단 340명과 북측 안내원 및 관련자 등 총 450명이 만경대에들어가 바글바글하게 움직여 누가 무슨 말을 썼는지 조차 몰랐으나 다음 날 ‘난리가 났다`며 소문이 퍼져 듣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 참가문제는 각 단체에서 대표자회의를 하는 와중에 일부 인사들이 참석하면서 벌어진 일이라고 설명했다.

대부분이 집행부에서 가지 말라고 해서 안갔는데 일부 사람들이 "10만 군중이 밥도 굶은 채 6시간 동안 땡볕에 서있다고 하는데 참관도 못하냐"며 가면서 문제가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탑은 도로에 조형물을 세워놓은 것에 불과하고 다른 조형물에 비해 선동성이 훨씬 덜하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러면서 도시인은 우리가 북한을 간다고 무조건 들뜨지 말고 준비해서 가야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북측에서는 남측 대표단에 대해 훤하게 파악을 하고 나오는데 우리 쪽에서는 누가 나오는지 조차 몰라 ‘대화’ 가 제대로 진전이 안됐기 때문. “북측의 문인대표는 나의 시 '접시꽃 당신’ 을 줄줄외는데 나는 그 사람에게 ‘선생님은 시를 쓰세요? 소설을 쓰세요?'라는 질문을 했다·’는 그의 말은 우리에게 얼마나 북측 대표단에 대한 정보가 없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출국할 때는 환송나온 어린아이들을 보고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지난 93년부터 현재까지가 전쟁후 복구기보다 더어려운 절대빈곤기로 아이들의 모습에서 '지독한 가난’ 을 읽었기 때문이다.
/ 홍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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