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러져간 그때 그 향토기업들

과거 성공에 안주 주먹구구식 경영으로 스러진 별들
경영 노하우없는 2세들도 쇠락의 길 부추겨

불과 20여년전인 70년대 만해도 도민들의 자랑거리는 "충북에는 사기공장 밀가루공장 사료공장 실공장 등'공장' 이 많다"는 거였다. 온라인 기업들이 IT산업을 중심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요즘의 가치관에서는 언뜻이해가 가지 않을 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제조업을 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그만큼 경제여건이 취약하기만 할 때인 그 당시 제조업체에 대한 사회적 신망과 존경심은 대단했다.

 이는 온라인시대를 맞고 있는 지금도 온전히 유지돼야 할 경제의 가치덕목이라고 해서 과언은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70년대까지만해도 충북경제를 상징하며 호령하던 '공장' 중 30년이 채 흐르지 않은 현재까지 살아남은 공장은 사기공장(한국도자기)뿐 밀가루공장(신흥제분)과 사료공장(삼화물산) 실공장(청방)은 모두 사라진 채 흔적조차 찾기 힘든 지경이 돼 버렸다. 어떻게 한세대의 짧은 시간안에 이들기업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을까.

이들 공장의 쇠락사를 볼 때 공통점들이 발견된다. 그것은 이들 공장(기업)이 한결같이 새로운 경제흐름, 요즘유행하는 용어를 빌려쓰자면 패러다임의 변화를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방향타를 잃은 상태에서의 경영은 주먹구구식의 방만한 경영으로 흘렀고, 거기에 낙후된 금융시스템 등 지방경제의 한계속에서 더 이상 존립기반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석유산업의 부흥에 석탄산업이 고사했듯이 격변하는 '의, 식, 주'의 양태변화로 밀가루공장과 옛 기술의 실공장등은 설자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선대의 경영철학과 노하우, 기업가 정신 등을 제대로 물려받지 못한 2세들의 경영실패도 주요 원인이 됐다.

향토기업들의 쇠락사를 살펴보면 이런 지적의 타당성은 확보된다.
신흥제분의 쇠락사를 보면 제방에 생긴 개미구멍때문에 둑이 무너지듯 승승장구하던 대기업이 어느 한 순간에 이토록 허망하게 해체될 수 있는 것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쌀장사 메주장사 엿장사 등 밑바닥에서부터 부를 일궈 1958년 충북에서 가장 큰 붉은 벽돌공장에다 신흥제분을 설립한 민철기회장은 한때 대전과 인천 서울에 분공장을 세우고 60년대 들어선 속리산관광주식회사를 설립, 속리산고속과 관광호텔 경영에까지 사업을 확대했다.

 또 1968년 청주 오근장(당시 청원군)에 청원제사(주)를 세우고 이듬해엔 중도석유를 차려 관광업 운수업유통업에까지 사업진출을 하며 기세를 뻗쳤다. 70년대 중반에는 대전에 당근넥타공장을 세워 음료업에도 뛰어들었다.
하지만 매사가 그렇듯 과욕이나 오판은 화(禍)를 부른다. 당근넥타가 인기를 끌지 못하면서 거대한 '신흥제분호'의 밑바닥에 구멍이 뚫려 물이 차기 시작한 것이다. '사업불패' 신화에 흠집을 낸 당근넥타공장은 신흥제분의 쇠락을 알리는 신호탄이됐고 이후 민회장은 속리산고속과 관광호텔을 동양고속에 매각해야 했다. 더구나 70년대 두차례나 강타한 소위 오일쇼크와 달러화의 강세라는 외부요인도 신흥제분호에는 넘기 힘든 파고였다. 덩치가 컸던 만큼 한 번 사세가 기울기 시작하자 민회장은 모기업인 신흥제분의 영업권을 70년대말 대한제분협회에 넘긴뒤 84년에는 지분마저 완전정리하면서 경제계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환경변화에 따라 사업변신을 하지못하고 무리하게 음료업계에 뛰어든 것이 신흥제분 왕국의 몰락을 재촉한 자충수가 됐던 것이다.
일신그룹은 1973년 이도영회장이 작고한 뒤 사양산업에 접어든 활석공장을 제대 첨단유망산업으로 구조조정을 하지 못한데다 선친의 가업을 이어받은 경훈 석훈형제가 갈라서 남한흥산과 알신산업으로 분리되면서 자멸한 케이스. 1대에 비해 배고픔이나 치열한 경쟁을 모르고 자란 2세들의 무기력한 경영능력이 문제점으로 드러난 기업흥망사의 사례가 일신그룹이었다는 게 지역경제계 원로들의 기억이다. 일신그룹의 계열사였던 남한흥산(남한제사의후신)의 터전이었던 옛 청주시외버스터미널 용지는 지난 1995년 성원그룹에 매각돼 그나마도 일신그룹의 자취를 더듬어보기가 힘들어졌다.

이런 면에서 삼화물산도 일신그룹과 비슷한 사례연구거리를 제공한다. 지금의 농협충북지역본부 옆에 사료공장인 삼화물산을 설립한 창업주는 청주상의회장을 지내기도 했던 장인환씨. 장사장은 70년대 ㅇ지사 시절 괴산 칠성면의 공유지를 싸게 불하받아 '동원목장' 까지 개발, 한때 1000두가 넘는 소를 사육할 정도로 사업을 확장시켜나갔다. 이 때문에 80년대 초반에는 '민철기 다음에 장인환'이라는 말이 나돌정도로 일가를 이뤘다. 하지만 지병과 함께 정신적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80년대 중반 장사장이 급작스레 사망하면서 사세도 급전직하하기 시작했다.

준비되지 않은 2세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청주에 있던 사료공장을 옥산으로 옮기는 작업을 떠맡고 동원목장 일을 건사시키는 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소멸한 삼화물산의 허망한 종말은 언제까지 사료가공업이 계속될 수 있을 것으로 본 단견과 체계화되지 못한 경영시스템이 부른 비극이었다.
/ 임철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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