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맥잇는 향토기억이 드물다

한국도자기 신흥기업 충북교통 삼화토건 등 명맥지켜
전국 유수의 신흥제분 일신산업 삼화물산 등은 뒤안길로

'충북을 대표하는 향토기업이 없다.'
다소 과장됐지만 이 정언(定言)은 충북 지역경제의 현주소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해 주는 말이 아닐까 싶다. 이 때문에 50-60년대는 물론 7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굵직굵직한 향토기업을 가졌던 도민들의 정서 밑바닥에는 커다란 상실김이 자리잡고 있다. 그 당시의 향토기업들이 전국적으로 누리던 명성과 지위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빈약했던 도세를 감안할 때 거의 기적에 가까운 성취였다. 물론 충북에 향토기업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2세 경영시대를 거쳐 3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인한국도자기를 비롯해 신흥기업사, 대신정기화물, 덕성건설, 삼화토건 등은 아직 우리 곁에서 건재하다. 그러나 이들기업들이 70년대까지 충북경제계를 주름잡던 옛 향토기업들처럼 확고부동한 신망과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가에 대해선 전폭적 동의가 형성되지 않고 있다. 21세기를 맞은 우리 경제의 규모와 기반이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지고 경제주체의 면면 역시 훨씬 다양해졌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그렇다.

'그때 그 시절'의 향토기업들에게 신화적 매력과 카리스마를 아직도 느끼고 있는 일반인의 정서속에 지금의 향토기업들은 대위적 위치를 꿰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50년대와 60년대는 지역의 몇몇 엘리트기업들이 충북경제는 말할것도 없고 나라경제를 좌지우지했던, 다시말해 걸출한 향토기업들이 전국의 경제무대에서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시기였다. 이때의 향토기업들은 앞서 말했듯이 빈약하기 짝이 없는 도세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인 명성을 휘날리면서 도민들에게 행복한 경험과 자긍심을 갖게했다. 신흥제분이 그랬고 일신그룹 한국도자기 청주방적 삼화물산 충주비료공장도 자랑거리였다.

■신흥제분:신흥제분은 50년대 충북도민들에게는 신화적 존재였다. 창업주 민철기씨는 한때 전국에서 종합소득 2위에 오를 정도로 신흥제분을 전국 굴지의 대기업으로 키운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물류비용이 임해(臨톱)지역보다 훨씬 비쌀 수밖에 없는 내륙도시청주에서 제분공장을 일으킨 한암 민철기씨는 이런 객관적 장해물을 뛰어넘어 청주에 이어 인천 서울 대전에 신흥제분 분공장을 세우며 승승장구, 불패신화를 만들어냈다. 충북에 기반을 둔 기업이 전국을 호령했던 것이다. '없는 사람은 죽을 틈도 없는 벱이여'라는 자신의 소신에 철두철미했던 민철기씨는 돈이되는 일이면 모든 것에 손을 댔다.

 대전의 당근주스 공장, 속리산고속 및 관광호텔 사업 진출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던 민철기회장은 농촌에 대한 남다른 향수 때문에 청주시 율랑동 일대에 20만평 규모의 과수원과 목장을 조성, 율랑동 포도와 복숭아 과수원을 지역명물로 만들기도 했다. 이때 “민회장네의 땅을 밟지 않고 이곳을 지날 수 없다"는 유명한 일화가 만들지기도 했지만 끝내 사업다각화를 착근시키지 못하면서 서서히 신흥제분 왕국에 균열이 발생, 80년대들어 완전히 스러지고 말았다. 신흥제분의 옛 영화는 민회장의 육영의지를 받들고 있는 신흥학원에서 가까스로 읽혀질 뿐이다.

■일신그룹:'문헌 이도영박사'가 세운 일신그룹은 도민정서에 가장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대표적 향토기업의 하나였다. 경성제대를 졸업한 이회장은 돈을 벌기위해 관계진출대신 삼양사계열인 경성방직에 취직, 기업가의 소양을 키웠다. 이회장은 이후 사촌형의 사위가 운영하던 충주시 살미면 목벌리 동양활석 광산의 경영참여 제의를 받고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을 걸은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이회장은 동양활석을 '일신산업' 으로 상호를 변경, 규모를 키우며 훗날의 일신그룹을 일궈냈다. 한때 충청일보와 청주MBC의 주식을 인수, 건전한 지방언론 육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70년대 청주MBC 라디오 프로인 '문헌장학퀴즈'는 당시 중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또 먹을 것이 없던 그 시절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청주시민의 인기를 끌었던 '번데기'는 이회장이 운영하던 남한제사 공장에서 비단실을 짜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때 번데기가 배고팠던 지역주민의 귀중한 단백질원이 됐음은 40대초반 이후의 장년층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제사업이 사양길에 접어든데다 한때 충청일보 사장을 지내기도 한 이회장의 아들 이석훈씨와 그의 형 경훈씨 형제 중심으로 경영체제 개편이 이뤄진 이후 사세가 급격히 기울어 끝내 허망한 기업일대기만 남겼다. 충주댐으로 활석공장이 수몰되면서 사업기반을 잃은 일신산업의 위기가 (주)한음파까지 미쳤기 때문이다.

■충주비료:흔히 '충비' 로 불린 충주비료는 교과서에도 실릴 정도로 충북을 '상징하는' 기업이었다. 그만큼 충주시민은 물론 도민의 자랑거리였다. 식량증산이 국가적 과제였던 50-60-70년대 요소비료를 생산했던 충비는 당시 취약하기 짝이 없던 남한경제의 중화학공업을 이끈 상징적 존재였다. 그러나 1983년 경제상황과 사회의 변천에 따라 조업을 중단한데 이어 1985년 새한미디어에 부지가 매각됨으로쩌 화려했던 한 시대를 마감했다.

■청주방적:약칭 청방으로 호칭되던 청주방적은 어느 기업못지않은 흥망사를 안고 있다. 일제시대 군수품 공장으로 로프를 생산하다가 해방후 광목공장으로 변신했지만 여러차례 부도 위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5년 전응규회장이 지역을 순방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경영브리핑을 완벽히(?) 해낸것을 계기로 대통령의 신임과 후원을 받으며 회사가 극적으로 회생하기 시작했다.

 대일차관까지 받아낼 정도로 수완을 발휘한 전회장은 이후 서울의 대왕코너와 의정부의 이화방직, 서울동방섬유를 창업하고 충북은행을 비롯 충북투금 청주개발 태앙생명 등에 출자하며 문어발식 사업확장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70년대 중반에 맞이한 최전성기는 곧 내리막길의 전주곡이었다. 2세 경영체제가 실패하고 충북투금의부정대출 사건에 깊숙하게 개입함으로써 자신은 물론 기업이미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채 '날개'를 접게된 것이다.

지난 시절 충북을 대표했던,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힘들 정도로 소멸해 버린 대표적 향토기업들을 골라 개략적인 소개를 했지만 기업분류와 소개가 너무 '거칠다'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다. 하지만 이들 기업들의 괴거를 새삼 반추하면서 우리는창업보다도 수성이 더 어렵다는 진리를 향토기업들의 흥망사에서 다시 확인하고 있다. 생물체와 마찬가지로 또하나의 유기체인 기업역시 탄생-성장-쇠퇴-사멸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지만 우리의 향토기업사는 생과 사의 사이클이 유난히 짧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리고 이들 기업이 대부분 1세 창업주 시대를 끝으로 사라져버린 공간을 다른 기업이 대체하지 못함으로써 충북지역경제계에 정신적 지주랄까, 구심점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50-70년대 충북이 누렸던 향토기업들의 르네상스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인가. 경제인들 뿐 아니라 기업환경을 형성하는 지역 공동체가 함께 가져야 할 문제의식이다.
/임철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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