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박완규씨를 만나게 된 것은 어찌보 면 우연에 가까운일이었다.
기자는 지난해 한겨레신문에 '굴욕 적인 전향의사를 철회한다'는 광고를 냈던 정순택씨의 이야기(1999년 5월22일 리뷰매거진 보도)를 다시 취재하려 했었다.9월4일 북송되는 비전항장기수 명단에,그토록 북송을 원했던 정 씨의 명단이 빠져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취재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지난해 화사했던 그 봄날 찾아갔던 청주시 내덕동 안덕벌 언덕배기 집에는 그가 살고 있지 않았다.물어 물어 얻은 정보는 음성군 금왕읍으로 이사를 갔다는 것이었다.때마침 그날은 남북 이산가족들이 서울과 평양에서 상봉하는 눈물겨운 날이었다.하여 공교롭게도 동사무소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도무지 알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정씨의 거처를 알고 있는 이와 연락이 닿았다. 그러나 그에게선 제도와 틀이라는 거대한 벽에 힘없아 허물어지는 한 개인의 모습이 오버랩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북송되는 또 다른 충북출신의 인사가 있다는 사실이 감지 됐다.그가 바로 박완규씨였다. 게다가 정씨와 박씨는 청주상고 동문으로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처지였다.박씨 또한 정씨의 북송자 명단 누락을 자신의 일처럼 아쉬워하고 있었다.

8월17일 청주상고 동문들이 주최해 서울에서 열린 북송자 환송 모임에는 그런 까닭으로 '명암'이 엇갈리고 있었다.충청리뷰는 정씨의 북송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결국은 좌절됐다.당연한 이야기지만,가고 싶어하는 분은 보내고,오고 싶어하는 분은 맞아야 한다.당연한 그 일을 실현하기 위해선 실무자간의 번거로운 노력이 뒤따르겠지만,국군 포로 송환 문제와 함께 그 사안들은 빨리 실현돼 야만 할, 우리들에게 남겨진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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