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사는 풍경 - 北으로 가는 '비전향장기수' 박완규씨

청원 부강이 고향, 67년 남파 무기징역 선고... 9월 4일 북으로 송환
이젠 떠오르지도 않는 가족 얼굴... "그래도 난 신념으로 살았소"

재판이 벌어졌고,박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그로부터 32년,서른 아홉에 감옥에 들어갔던 박씨는 고희를 넘긴 일흔 한 살에 출소했다.99년 2월25일 김대중 대통령 취임1주년 기념 특시로 석방된 17명 가운데 이미 늙어 백발이 성성한 박씨가 끼여 있었다. “수감생활, 그걸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소.70년대는 악몽의 연속 이었어요.80년대 전두환 정권 들어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요.좌익세력이었던 김하기씨와 얼마간 같은 사방에서 지내기도 했죠."

김하기씨.90년대,소설 ’완전한 만남’ 으로 비전향장기수들이 겪었던 비 인간적인 수형생활을 고발해 일대 센세이션을 몰고 왔던 사람.지난 96년 중국 여행중에 두만강을 건너 취중 월경해 국가보안법위반으로 구속됐다가 지난 3월 석방된 소설가.박씨는 김하기 씨를 두고 비전향장기수라 부르지 않았다. 대신 '사상범'이라 호칭했다.하면서도 김하기의 소설 ’완전한 만남'을 보면 비전향장기수들이 겪었던 고초를 어느 정도 엿볼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72년에 가히 ‘살인적인’ 전향 공작이 이뤄졌어요.사상전항공작 전담반을 구성해서 폭력과 협박을 동원했는데,그 전담반 사람들은 공채 6급공무원이었죠.먹는 수준이 어떠냐하면 네 숟가락이면 끝나는 게요.일명 '4등밥'이라 불렸죠.반찬은 무짱아찌와 씨래기 국이 전부였는데,전문가들 소견에 의하면,그렇게 3년을 먹으면 영양실조로 사망하게 된다는 거예요.죽지 않으려면 집에서 돈을 가져다 쓸 수밖에 없는데 그들은 압력 수단으로 그것을 차단 하는 거죠.계란이나 건빵 등 사식을 먹어야 생존을 위해 버틸수 있는 힘이 생기는데,그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이죠."

'반공국시' 가 최고의 가치로 군림하던 시기였다.사회 분위기는 살벌했고, 수형자들의 생활은 비례적으로 더욱 열악해졌다고 박씨는 회고했다. “대부분 0.75평 되는 독방생활을 하는데,3년간 혼자서 벽만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해 봐요.정신착란이 옵니다.얼굴은 창백해지고 뼈 가죽만 남아서 겨우 연명하는 수준이 돼 버리죠.그런데도 차라리 그런 독방이 더 나아요.그 독방에 세명만 같이 집어 넣는다고 생각해봐요.앉아 있기조차 불편한 좁은 공간에서 잠을 어떻게 잘수 있겠습니까. 대구,광주,전주, 안동,대전교도소,이렇게 다섯군데가 죄익수들이 수감돼 있는 형무소입니다.

그중 광주와 대전에서의 전향공작이 악랄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물고문에 일명 '떡봉-떡을 치듯 구타하는 것’ 으로 온전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게 다 7.4공동성명 때문인데, 장기수들을 북송시키지 않으려고 전향공작에 그렇게 매달렸던 겁니다." 박씨는 32년간 줄곧 대전교도소에 있었다. '교회사'라 명명된 별정직 공무원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교회사들은 맨투맨 식으로 비전향장기수들에게 폭력깡패를 붙여 밤낮없이 폭력을 가했었다고 한다.죽이지만 말고 전향시키면 석방해 준다는 달콤한 미끼와 함께 "대전 교도소에서 3명이나 죽었어요.그 폭압을 견디지 못했던 게지요.

그 일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자 폭력과 고문의 강도가 조금 낮아지기는 했죠.나는 그렇게까지 심한 폭력을 당하지는 않았어요.67년 수감된후 5년만에 급성 폐렴이 찾아왔는데,옆구리가 아프고 숨을 쉴수 없겠더군요.하룻밤새 폐가 곪아버린 거예요.x-레이 촬영을 했더 니 왼쪽 폐가 새까맣게 곪아있었는데,기침을 하면 농이 나올 정도였어요.폐렴 탓에 폭력으로부터는 거리가 약간 있었지만,그 병은 제때 치료를 하지 않으면 생명을 잃을수 있는 것이었죠.그런데 의사라는 양반 하는 말이 걸작 이에요.’당신은 중환자라 입원시켜야 하는데,비전향이면 입병이 안된다.그러니 전향하라.' 내가 대답했죠.안한다.

내가 사상범으로 들어왔는데, 내 의지와 생각은 정당한 것인데,내가 어떻게 전향을 하겠느냐.의무과장인 당신은 환자의 생명을 고치는 의사이지,장기수를 전향시키는 공작원이 아니잖느냐. 정 입병이 안된다면,내 죽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입병 안되고 감옥으로 돌아왔는데,매일 맞아야 되는 항생제 마저 일주일에 두 번씩 밖에 놔주는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지 않을 만큼만 인심쓰는 거였죠." 박씨는 약도 제대로 쓰지 않은 상태 에서도 2년만에 기적적으로 폐렴이 나았다고 한다.그리고 그는 그의 말대로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8월15일 광복절을 맞아 남북 동시의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다.북에 두고온 가족 생각에 드라마 같은 장면 장면이 남달랐을 박씨는,그러나 가볍게 들뜨거나 흥분됨이 없이 덤덤하게 말했다. "빨리 이뤄졌어야할 일이었죠.지속적으로 상봉을 정례화해야 합니다.서로가 서로를 이해 하려면, 나만 주장하고 내세울게 아니라 상대편의 입장을 이해해야합니다.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할 때 화해와 협력의 시대가 열 릴 것이요,통일이 앞당겨 질겁니다.

연세대학생들과 만남의 자리가 있었는데,그들은 북한을 너무 모르더군요.재야 단체도 마찬가집니다.북의 제도,북의 문화,북의 생활을 똑바로 알아야 서로의 협력점을 찾을수 있을겁니다.내 것 만이 우월하다는 식의 사고방식부터 버려야 합니다.박씨는 며칠전 '민가협'과 수련회를 다녀왔다.17일에는 청주상고 동문들이 마련해준 비전향장기수환송회에도 갔었다.그에게 남아있는 하루하루는 매우 바쁘다.그가 북으로 가기 전까지 정리할 많은 것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민가협의 ‘양심수후원회’의 후의에도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하고, 천주교인 원위원회 장기수후원회의 도움도 그에겐 빚으로 남았다. 불교 장기수 후원회도 잊을수 없는 단체고,감리교의 ‘권한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모임’에도 마음이 쓰이고,비전향 장기수들의 보금 자리인 '갈현동 만남의집' 인근에서 물 심양면 도움을 주는 교회분들의 정성도 박씨가 북으로 갈 때 같이 가져가야할 마음의 선물이다.3개월간 배운 컴퓨터,이제 인터넷 재미도 알게 됐고,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의 격려전화도 받아야 한다.하루 하루가 모두 천금같은 시간이다.그래서 그는 요즘들어 부쩍 바쁘다.

북에 가면 30여년을 기다렸을 아내에게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질문했다.박 씨는 멋적게 웃으며 대답했다.
"뭐라 말할지 전혀 떠오르는 말이 없소.너무 긴 이별이었던 거지요.그 아픔을 나만 겪은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떠오르지 않는 아내 얼굴을 애써 그리려 하지 않습니다.30년 넘는 세월,외로웠을 아내에게 나 없이 힘들었지?' 한마디만 하겠습니다.나는 내 신념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그리 원망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말이죠."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