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매거진(사람사는 풍경) - 別離 ... 그리고 思婦曲 허익씨

"당신도 꽤 늙었구료."
"세월을 누가 막겠어요."
“어떻게 살았소? 나 섭섭하게 생각말고 딴 남자 얻지·…”
“내가 그럴 사람이요?"
“이 못난 사람 기다리지 말고 좋은 사람 만나지 그랬소?”
"한 번 결혼 하면 그만이지,이래저래 바꿀수 있나요?"

이글은 삼가 옷깃 여미는 마음으로, 혹여 더 큰 상처로 남는것은 아닐까 저어하는 마음으로 쓰여지고 있다. 꿈에 못잊을 고향땅을 밟고, 북에 두고 온 가족들, 그 아련했던 뒷모습만으리다 다시금 볼수 있다면 여한이 없으리라는 실향민들의 아픔은 종결형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50여년의 한(恨). 어찌 그 오랜 세월의 가시지 않을 아픔을 짧은 글로 다 헤아릴수 있으랴.어렵사리 취재에 응 하면서도,‘그냥 노인네 푸념으로만 담아 듣고 기사로 쓰지는 말아주오’ 라고 당부하던,이제는 검버섯 여기저기 피어버린 한 노인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하려고 한다.

허익씨(83 · 청주시 탑동)의 이야기는 영화와 같은 ‘러브 스토리’ 다. 그러나 그 영화의 빛깔은 화사한 수채화의 그것이 아니라 블루 색조가 많이 든 슬픈 이미지의 유화에 가깝다.“서른 남짓한 나이에 월남했어요.그 때 처자를 두고 왔으니 벌써 50년 세월이네요.경황도 없이 넘어오면서 곧 처 자식 데리러 가려니 했는데,그 분단의 벽이 이렇게 높을줄 누가 알았겠어요." 허씨가 월남한 것은 51년.유행가 가사처럼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서~' 가족 한명이라도 더 태우고 월남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던 때였다.

사실 처자와의 이별을 허씨는 전혀 생각도 못했다.월남하게 된것도 어찌 보면 우연히 이뤄진 거였다.
“국군이 함흥,원산 쪽에 들어왔을때 책임자가 김현재 대령이었어요.김대령 은 제 조부 생전에 도움을 많이 받았죠.어린시절 김대령 재주가 비상해서 사랑해주고 돈도 대주고 하셨던 모양인데,김대령 그분이 그 은혜를 잊지 않았던 게요.

그분 부인과 소령 계급장을 단 양반이 짚차를 타고 나를 찾아와저 는,빨리 타라,지금 우리는 후퇴중인데 김대령님의 특별 지시로 당신을 데리러 왔다’ 하더군요.가보니까 성진시 대대본부예요.들어가니까 기다리고 있던 김대령이 제게 묻더군요.조부 존함이 뭐냐? 조자 곤자 쓰신다고 하니까 배편이 마련됐으니 빨리 타라 하시더군요.처와 자식을 데려와 한다니까, 가 족은 안된다, 얼마뒤에 다시 찾아오면 되지 않겠느냐 하더군요.결국 함경남도 북청 인근에 있는 서호진에서 배를 타고 월남하게 됐지요."
그러나 허씨는 그것이 50년 무심한 세월을 뼈와 살을 꺾는 아픔으로 지내야 하게 되는 줄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허씨의 가계(家系)는 소위 ‘뼈대’ 있는 집안이었다.조부는 당시 조선 뿐만 아니라 일본,중국 러시아에서도 알아 주는 명의였다 한다.그래서 세간으로 부터 붙여진 별칭이 ‘편작’ 이었다 한다.남 돕는것을 좋아하고 어려운 사람 쉽게 보아넘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부친은 판사였다고 한다.일제시대 강원도지사를 하던 이범묵씨가 부친과 동기동창으로 막역지우였는데,이범묵씨가 간도성의 성장으로 영전됐을때 부친 까지 끌어들여 그곳에서 판사 생활을 했다 한다.

허씨가 주위사람들로부터 들은 소문과 기억으로는,조부와 부친은 당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김좌진 장군과 홍범도 장군의 군자금을 대고 있었다고 한다.스스로도 확인할 길 은 없지만,그래서 자신의 가정 살림이 ‘거덜’ 나게 된거라는 말을 듣곤 했다고 한다.
그런 가계의 영향 탓이었을까.허씨 또한 할 말은 하고 사는 이였다.북에 있을 당시 그는 '반동 언사'로 감옥 생활을 1년간 했다.

“그때 해방되고 ‘대한청년단’ 학동면 책임단장을 맡고 있었어요.그런데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가 영 아닌게요. 그래 어느날 그런 발언을 했어요. 이 작은 나라가 일본에 예속돼 있다가 지금에 와저 세계적인 정세로 말미암아 해방이 됐는데,이 작은 땅덩어리에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서로 갈려 있으니 이래서야 어찌 살겠는가.통일이 돼야지 이렇게 살다보면 또 어느 나라 식민지 생활을 하게 될지 누가 아느냐? 그런데 그 발언이 문제가 됐지요.

군사법정에서 4년 언도 받고 판사가 1년 선고 했지요.48년에 수감돼서 49년에 출옥 했어요.어차피 떠났어야 할 그곳이지만,그렇게 가족을 두고 떠나는 것은 아니었지요." 월남한 허씨는 한시도 북에 두고 온 가족을 잊지 못했다.그것은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아들 딸 4남매를 낳아 지내온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북에 두고 온 처자식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괜스레 그들에게 드는 죄책감으로 가슴 저미는 밤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월남한 허씨는 가족을 데 리고 와야겠다는 일념으로 당시 북한 지역에 침투해 공작활동을 벌였던 특수 부대 HID에 자원입대한다.

“한마디로 지옥훈련이었죠. 세번 북한으로 넘어 갔는데,한 번은 해안 경비정에 발각돼 실패하고 두번은 성공해 침투하게 됐죠.함경북도 청진시(현 김책시)금천동 19번지에 아내와 아들이 살고 있었는데,몰래 찾아가 보니 그땐 다른 사람이 살고 있더군요.그랬어요.목숨 걸고 간첩으로 북파되는 건데,아내 사랑하는 마음 없었으면 어떻게 그렇게 할수 있겠습니까.진심으로 서로 사랑했었지요."
지금도 허씨는 야음을 틈타 북한땅허 상륙하다 입은 상처 때문에 오른손 약지를 쓰지 못한다.

“아무나 함부로 하지는 못하는 거였죠.살지 못하면 죽는 거였으니까요.보통 3박4일 정도 정보활동을 하다 내려 오는데 가족을 데려온다는 일념으로 겁이 없었어요.그렇게 했는데도 아내를 만날수 없었죠."
사선까지 넘어가며 아내에 대한 사랑을 버릴수 없었던 허씨.그의 ‘러브 스토리’ 는 여기서 끝나지는 않는다.무심한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 어언 50년 뒤 의 하구에 닿았다.1999년,허씨는 그해 11월에 실로 50년만에 아내를 만났다.친척의 도움으로 중국에서였다. 꽃같던 아내는 이제 백발이 돼 있었다.그 아내가 50년의 세월을 건너 지금 허씨 곁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결혼한지 3년만에 이별하고,그 후로 50년…,이제 서로 무슨 말을 건넬 것 인가.
"당신도 꽤 늙었구료."
"세월을 누가 막겠어요."
“어떻게 살았소? 나 섭섭하게 생각
말고 딴 남자 얻지·…”
“내가 그럴 사람이요?"
“이 못난 사람 기다리지 말고 좋은 사람 만나지 그랬소?”
"한 번 결혼 하면 그만이지,이래저래 바꿀수 있나요?"
가슴이 답답해졌다.더욱이 얼굴도 모르는 북에 있는 손녀가 시집을 가는 데 할아버지 만나거든 이불감 좀 가져 오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땐 가슴 속으로부터 북받치는 설움을 억누를 길 없었다.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했던 아내를 만나기 위해 그는 가까스로 240만원을 마련해 중국으로 건너 갔었다. 뻔히 보이는 아내의 살림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 졌지만 어쩔수 없는 노릇이 더 마음 아프게 다가왔다.그렇듯 너무도 답답해 아내와 헤어질 때 허씨는 자신이 먼저 발길을 돌렸었다. 꿈같은 남북정상회납이 성사됐고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접수가 시작됐다.허씨도 접수했다.그러나 마음이 무겁다.아내를 만날 돈이 없다.여든이 넘은 세상살이에서 그렇게 가볍게 치부했 던 ‘돈’ 이라는 녀석이 이렇게 사림을 옭아맬줄은 정말 몰랐었다.

“白酒未工緬(흰술은 사람 얼굴 붉히고), 黃金쁨士心(황금은 선비의 마음을 어둡게 한다)이라 했지요.돈도 없이 늘그막에 두고 온 아내를 만나려는 마음이 혹시 주책은 아닐런지,내 욕심만 부리려 하는 것은 아닐런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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