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특수부대 이렇게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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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특수부대 이렇게 끌려갔다"
  • 충청리뷰
  • 승인 1999.12.25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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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학씨 "빨간줄 없애준다, 회유 납치' 주장

대북 침투를 목적으로 한 특수부대의 훈련대원 차출과정에 대한 상세한 진술이 최근 언론에 공개됐다. ‘월간중앙’ 12월호의 이근안 고문피해자 특집기사에 소개된 납북어민 출신 김성학씨(49)가 그 장본인이다. 지난 85년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죄로 구속되기도 했던 김씨의 파란만장한 ‘분단인생’ 은 한편의 영화와 같다. 속초가 고향인 김씨는 22세때인 71년 8월 울릉도 북방에서 오징어잡이를 하던 중 짙은 안개 때문에 고립됐고 이어 북한경비정에 강제로 납북됐다. 당시 25명의 선원들은 1년간의 북한 억류생활 끝에 모두 무사히 송환됐다.

하지만 납북귀환 어부들를 맞는 수사기관의 눈길은 냉랭했고 도착 즉시 여관방에 갇혀 며칠동안 경찰의
집중조사를 받았다. 선원들은 자의든 타의든 북한으로 월경했다는 이유로 예외없이 '반공 법위반’ 으로 재판에 회부됐다. 대부 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지만 선주와 선장은 실형을 살았다.

그러나 납북 경험과 '반공법 위반' 경력은 이후 김씨의 삶에 엄청난 그늘을 드리우게 된다. 73년 속초어민중대 방위병으로 근무한 김씨는 전역을 보름 앞둔 74년 6월 이른바 대북침투 목적의 특수부대원을 만나게 된다. 부대 관계자는 "한번 모험적인 일을 할 생각이 없느냐, 월급도 대졸 회사원보다 많다"며 권유했고 김씨는 나름대로 반공법위반자라는 전력이 부담스러운 처지에 '이번에 협조하면 ‘빨간 줄’ 이 지워지지 않을까'하는 기대감도 가졌다는 것.


하지만 김씨의 얘기를 전해들은 부모님은 ‘장남이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며 역정을 냈고 스스로 포기하 게 됐다. 그 며칠후 방위복무를 마친 김씨는 친구집에 다녀오는 길에 전에 만났던 특수부대 관계자등 4명의 남자들 에 의해 반강제로 납치된다. 눈를 가린채 1시간여를 달려 외진 산속의 단독건물안으로 끌려갔다. “우리한테 협조해라, 이곳은 마음대로 나갈 수 없는 곳이라는건 너도 잘 알 것이다. 우리말을 어기고 혼자나가다 죽으면 책임못진다’’며 부대관계자는 복무계약서에 손도장을 찍도록 강요했고 극도의 공포감과 자포자기속에 김씨는 굴복하고 만다.

산속에 별장처럼 지어진 단독건물에서 몇사람이 한팀을 이루어 생활을 했고 김씨는 육체적 훈련보다는 사진기술 등 특수한 ‘기술’ 을 집중교육받았다. 팀별로 움직이기 때문에 다른 부대원들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고 ‘출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고 지냈다. ‘출장’ 은 임무를 띠고 실제상황에 투입된다는 의미였고 ‘이미 내놓은 목숨’ 을 ‘진짜로 내놓는 일’ 이었다.

이곳에서 2년간 교육을 받은 김씨는 장래에 대한 걱정과 ‘출장’ 공포감 때문에 탈출을 결심했고 실행에 옮겼으나 막사를 벗어난지 몇발짝만에 목덜미에 총구가 겨눠지는 경험을 해야했대 결국 희망을 접어둔채 고립된 생활을 하다가 부모님의 간절한 노력 끝에 악몽같은 특수부대 생활을 벗어나게 됐다. 당시 김씨의 부모는 아들이 갑가지 사라지자 제대전의 얘기를 떠올리곤 인근 부대 부터 샅샅이 찾아다니며 자식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김씨 부모의 헌신적인 소재파악 노력이 군기관에 파다하게 소문이 났고 결국 김씨가 근무하던 부대에서 도 이러한 사정을 알게됐다. 더 이상 문제가 불거지기를 꺼린 부대에서 할수없이 김씨를 자유의사에 따라 돌려보내게 됐다. 하지만 '보안사찰 대상지' 라는 꼬리표가 붙어 어느 직장을 가든 정보과 형사로부터 동향 감시를 당했고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81년 결혼과 함께 고향을 떠난 김씨는 경기도 광주에서 전파상을 하던중 85년 경찰에 연행돼 악명높은 경기도 대공분실에서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했다. 경찰에서 허위자백을 강요당해 ‘반국가단체 찬양고무죄’ 로 기소됐으나 89년 9월 대법원으로부터 무죄를 확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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