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미도에 버려진 '인간 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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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미도에 버려진 '인간 병기'
  • 권혁상 기자
  • 승인 1999.12.25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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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고립, 작전 취소, 보급 악화로 불만 폭발
69년 무이도 인질극 벌인 3명 현장 사살

실미도 특수부대의 훈련은 말 그대로 ‘인간병기’ 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68 년 남파된 김신조 무장간첩단의 체력이 완전무장을 하고 1시간당 10km이상 산악행군이 가능했지만 실미도부대는 시간당 12km 이상의 기록을 나타냈다는 것. 또한 소련, 중국을 포함한 공산권 국가의 총기류 전반에 대한 사격술을 습득해야만 했다. 대북 침투를 목적으로한 부대였기 때문에 평소 북한군 복장으로 훈련에 임했고 북측의 동작과 말씨까지 철저하게 몸에 익혔다.

당초 31명의 특수부대원 가운데 훈련과정에서 숨진 사람은 4명이며 대부분 훈련강도가 높았던 1년이내에 사고를 당했다. 이들은 외출, 외박, 편지도 허용되지 않은채 철저하게 고립됐고 바깥소식은 실미도 외곽 경비근무를 맡고있는 기간병들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지만 대부분의 대원이 전과자 출신으로 이미 가족과 단절된 경우가 많았고 평균 학력도 낮아 국대정세 등 사회적 관심도가 낮았다. 다만 건강한 20대 남자의 생리적인 욕구에 대해서는 특별한 해소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대부분 입소전에 여자경험이 있는 대원들이었기 때문에 성적욕구를 억제 시키는 것이 어려웠다. 궁여지책으로 한밤중에 인천 윤락가로 인솔해가서 여자를 접할 기회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육지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기회 였기 때문에 탈주를 대비해 출입문과 창문 등이 봉쇄된 장소를 물색해야만 했다" 훈련교관을 맡았던 김일용씨(당시 중사)의 증언이다.

썰물때는 실미도와 5OO~600m 떨어진 무이도까지 갯벌이 드러나 대원들의 훈련장소로 활용됐다. 무이도는 작은 섬마을에 초등학교 분교까지 있었지만 대원들은 훈련중에 마을로 연한 산등성이를 절대 넘지않았다. 하지만 69년말 무이도에서 최초의 집단탈주 사건이 발생했다. 3명의 대원이 부대막사를 이탈, 무이도 분교로 잠입해 여교사, 학생들를 대상으로 인질극을 벌이는 소동이 벌어졌다.
결국 고도의 ‘인간병기’를 제압하기 위해 같은 대원들을 출동시켰고 막다른 상황에 처한 탈주대원들은 별 저항없이 사살 당했다는 것.

“그때 여교사까지 성폭행 당하는 등 사태가 심각했다. 하지만 섬지역이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외부에 일체 알려지지 않은채 감춰졌다. 훈련과정에 익힌 대로 3명 모두 칼로 자살한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훈련과 인질극 이외에 숨진 1명은 기간병을 때린 것이 문제가 된 경우다. 대원들이 재판형식으로 총살결정을 내렸고 대원들 손으로 직접 처형시켰다” 김씨는 그때마다 용케 육지로 나와 있었기 때문에 사건에 휘말리는 불행을 면할 수 있었다.

대원들의 사기가 극도로 떨어진 계기는 백령도 철수사건에서 비롯됐다. 대북침투라는 절대임무를 위해 2년이상 반복훈련을 쌓아온 70년 8월 마침내 작전명령이 하달됐다.
대원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북방 한계선과 인접한 백령도로 이동했다. 하지만 남북한 상호비방금지 협약이 체결되는 등 대북해빙 조치가 이뤄지면서 작전계획은 한순간에 취소됐다. "사실상 대원들은 특수임무라는 목적 하나로 반경 1.2km의 실미도에서 목숨을 걸고 훈련을 받아왔다.

 하지만 고대했던 작전이 취소되고 자신들의 장래에 대한 불안감, 보급 부실에 따른 불만 등이 겹치면서 집단탈주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훈련대원에 대한 인권유린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사실과 다른 주장이다, 그들은 교관, 기간병들과 한솥밥을 먹는 처지였고 대북 공작원들을 비인간적으로 교육시키면 침투후에 귀순우려가 있기 때문에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속사정이 있다” 김씨의 설명이다.

하지만 실미도에서 숨진 8명의 대원들을 변변한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채 서둘러 육지로 옮겨 화장처리한 점, 부대 보급이 최악의 상태로 악화된 점, 대원들에 대한 급여 등 경제적 조건에 대한 사후처리 등에 대해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71년 8월 실미도 탈주사건직후 상부의 특별 지시에 따라 5채의 막사 등 특수부대 시설일체를 폭파시키고 마지막으로 철수했다.

 이후 28년만인 지난 11월 MBC '이젠 말할 수 있다’ 취재팀과 함께 실미도 현장를 찾아갈 수 있었다. 김씨는 “풀과 나무가 우거져서 막사위치를 찾기가 쉽지않았다. 겨우 우물자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불행한 역사의 희생양인 그들을 위해 위령비라도 세 워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부대창설의 결정과정과 대원들의 차출경위, 사후처리 과정, 부대관리 책임유무에 대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보지만 대북작전 개념으로 볼 때 관련서류를 찾기는 힘들 것”이라고 최근의 심경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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