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폭력 청주도 예외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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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폭력 청주도 예외 아니다
  • 충청리뷰
  • 승인 1999.11.2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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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덕동파출소 피습사건, 청대생 3명 물고문 자행
보안부대, 구덩이 파고 '생매장' 위협까지
감정적 폭력, 인간성 파괴 정신적 후유증 심각

‘지옥의 사자' 로 불리던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이 도피 11년만에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경기도경 소속의 대공전담 경찰관인 이근안은 수많은 민주화운동 활동가들에게 전기고문, 물고문 등 인간이기를 포기한 가장 잔혹한 방법의 폭력을 가한 장본인이다. 장기간 도피생활을 해온 이근안이 공소시효를 몇 년 앞두고 스스로 정체를 드러낸 것은 50년만의 정권교체라는 엄청난 시대변화가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군부독재 시절의 온갖 추악한 역사가 남김없이 발가 벗겨지는 현실에서 그의 정신적 도피처가 먼저 무너지고 만 것이다.

80년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대학 운동권, 재야 활동가들에 대한 공권력의 고문 · 폭력은 청주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경찰, 보안사(현 기무사)가 주도적으로 고문 · 폭력을 자행했고 시위 · 연행과정의 구타는 지극히 일상화 된 폭력이었다.

‘충청리뷰’ 는 80년대 청주의 ‘고문 · 폭력 피해사례‘를 간추려봤다. 취재과정에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당시 상황을 돌이켜 생각하기를 꺼려했다. ‘짐승에게 유린당해 인간성을 파괴당한 상처’ 를 다시 꺼내보이기를 기피했다. 피해당사자가 취재를 거절하는 경우 가까운 주변인물을 통해 정황을 간접취재할 수밖에 없었다.

취재결과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고문 · 폭력을 자행한 장본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잊지못하고 있었다. 누구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일’ 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상처를 안겨준 가해자들은 지금도 버젓이 공직생활을 하고 있다.

 아무런 사과와 반성도 없이 이 격변의 시대를 온전 하게 함께 살고 있다. 이에대해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민주화운동 피해보상법이 단순한 보상차원이 아닌 제 2, 제 3의 이근안을 찾아내는 특별법으로 확대되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도내 최초 파출소 피습
86년 5월 도내에서 처음으로 청주 내덕동파출소가 대학생들로 보이는 20대 청년들로부터 화염병 습격를 당했다. 한밤중에 순식간에 상황이 벌어졌고 당황한 경찰관들은 현장에서 아무도 붙잡지 못했다. 하지만 경찰수뇌부에서는 최초의 파출소 화염병 피습 이라는 점을 들어 범인검거 및 지역 민주화 운동세력에 대한 전모파악을 지시했다. 일단 경찰은 청주대 운동원 학생들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일제 검거에 나섰다.

특히 유수남씨(36 · 청주대 83학번)를 잡기위해 대학인근을 샅샅이 뒤졌고 마침내 자취방을 찾아내 함께 방을 쓰던 후배 전호철씨(85학번)를 연행했다. 또한 EYC기독교 학생운동를 함께 했던 황규훈씨(84학번)도 당시 육거리 충북민련 사무실앞에서 동부서 정보과 형사들에게 연행당했다. 이들이 끌겨간 곳은 피습을 당한 내덕동파출소 숙직실이었다.

황씨는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첨엔 손가락 사이에 볼펜을 끼우고 돌리다가 피습사건에 대해 ‘정말 아무 것도 모른다’ 고 진술하니까 주먹, 발길질을 퍼부었다. 하지만 피습사건의 배경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진술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옷을 전부 벗기더니 손과 발을 묶기 시작했다. 묶인 발 사이에는 뭉둥이를 끼워서(비녀꽂기) 옴짝달싹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얼굴에 수건을 덮고 주전자로 물을 붓기 시작하는데, 정말 죽는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경찰은 황씨가 피습사건과 무관하다고 판단한 듯 대학내 운동권 조직원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다. 당시 물고문을 주도한 경찰관은 현재 동부서 정보과에 재직중인 김모씨등 3명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사실대로 다 불거면 엄지손가락을 움직이라’고 주문 한 뒤 계속 물을 부었다.

하지만 결박된 손이 마비상태가 된 황씨는 엄지손가락 하나 의지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나머지 손가락을 움직이면 잠시 물고문이 중단됐다. 하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진술이 아니다 싶으면 또다시 수건을 씌우고 주전자를 들이댔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그토록 잔혹해 질 수 있는지, 지금 생각해 봐도 이해할 수 없다. 간혹 토막살해같 은 충격적인 살인사건 보도를 접할 때 그 사람들 얼굴이 떠올려지곤 했다. 아마 그때 그 사람들은 인간의 마음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황씨는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증언했다.

흥분한 경찰, 운동권 반격나서
내덕파출소에서 하룻밤을 꼬박 지샌 황씨는 이튿날 오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당시 동부서 계장급 간부는 황씨 에게 ‘전향하면면 너에게 필요한 혜택을 줄 수 있다’ 며 정보원으로 회유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내덕파출소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전호철씨는 폭력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이후 시위현장에 나서지 못했고 지금은 청주를 떠나 연락마저 두절된 상태다.

또한 핵심주모자로 지목됐던 유수남 씨는 무려 3일동안 물고문을 당했고 무자비한 구타로 오른쪽 연골이 파열 돼 몇년뒤 골종양 수술을 받기도 했다.
특히 청대생 3명의 진술을 토대로 이강현씨(85학번)가 충북대 주변에서 경찰에 불시연행됐다. 이찌는 서부서로 끌려가자마자 신문지로 싼 몽둥이로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당시 경찰은 파출소피습사건의 관련자를 검거하기 위해 ‘거의 이성을 잃을 상태였다’ 는 것이 재야 활동가들의 증언이다. 취재를 꺼려한 이씨는 간접적으로 가족에게 당시 상황을 전달했다. "무차별적인 폭력의 고통과 두려움에 결국 굴복했다는 사실이 내내 괴로웠고 한때는 ‘스스로 인간이 아니다’ 고 자학할 만큼 정신의 황폐화를 겪었다. 그때 후유증으로 목뼈가 휘었고 허리 통증이 가시지 않고 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한번도 어깨무등을 태워주지 못했고 아이들이 보챌 때마다 그때 생각이 되살아나서 우울해 진다는 것이다”
이밖에 A씨(공주사대 83학번)는 고문폭력의 후유증으로 한때 신경불안 증세를 보여 입원치료까지 받기도 했다. A씨는 시위현장에서 연행돼 경찰에서 무수한 폭행을 당했고 교도소에서 신경불안 증세를 보여 재판정에도 출두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결국 87년 12월말 구속피의자가 참석하지 않은 궐석재판으로 집행유예가 선고되면서 풀려났다.

보안대, 군대식 보복폭력
86년 경찰의 대대적인 검거선풍에 휘말렸던 운동권 · 재야 활동가들은 혹독한 폭력속에 진술을 강요당한 사실이 못내 '잊고싶은 앙금’ 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때 경찰은 청주지역의 운동권 조직망을 밝혀내고 타격를 가하기 위해 혈안이 됐고 연행자들 대부분은 고문폭력에 굴복했다는 자괴감을 갖고 있다. 결국 내 입을 통해 상대방이 후속연행되는 고통스런 상황이 정의와 양심을 목숨처럼 여겼던 활동가들에게는 참지못할 괴로움이었다”고 당시 재야인사는 회고하기도 했다.

당시 경찰의 폭력 이상으로 학생운동권 · 재야활동가들에게 두려움의 존재는 보안부대였다.
87년 7월 충북대앞 시위에서 초등 학생이 경찰차에 깔려 사망한 사건은 엉뚱하게 보안대와 학생 운동권간의 감정대립으로 비화된 경우다. 시위현장에서 시내 남궁병원으로 옮겨진 초등학생은 이미 절명한 상태였고 학생들은 병원주변 대자보를 붙이고 빈소를 지키며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때 현장을 지나던 30대 후반의 남자가 대자보를 찢어버렸고 이를 목격한 대학생들이 병원내 사무실로 끌고와 조사를 벌였다. 남자의 신분은 현역 공군 장교로 밝혀졌고 일부 흥분한 학생들이 남자에게 폭행을 가했다는 것.
며칠 뒤 장현동, 유양우씨(충북대 85학번)가 정체불명의 남자들에게 각각 연행됐고 차안에서 눈를 가린채 끌려갔다.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옷을 벗긴채 무자비한 폭행을 당했다. 병원에서 군인을 때린 장본인이 아니냐는 추궁이었다. 유찌는 10시간 가량 몰매를 맞았고 경찰로 넘겨졌지만 상처부위가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막기위해 무려 20일간 면회를 금지시켰다.

특히 유씨보다 먼저 연행된 장씨는 생매장 위협까지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장씨가 보안대에서 먼저 조사받았다는 사실은 그 사람들한테서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청주교도소에 수감되면서 뒤늦게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때 서로 당한 얘기를 들어보니 정말 끔찍했다. 한밤중에 눈을 가리고 장씨를 어느 산으로 끌고가서 구덩이를 파고 머리만 내놓고 묻어버렸다는 것이다. 물고문까지 당했다고 얘길 틀림없이 들었다" 유씨의 증언이다.
이 사건의 충격으로 장씨는 아예 운동권을 떠났고 서울로 거처를 옮겨 동료들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정신적 충격, 운동권 떠나
보안대는 당시 충북민련 사무처장인 김형근씨도 불법연행해 하룻밤을 꼬박 새우며 폭행을 가했다. 이 사실을 알아챈 재야인사들이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정기호변호사에게 연락을 취했고 정변호사가 개신동 보안부대를 찾아가 정문앞에서 면회를 요구하며 장시간 버티자 결국 하룻만에 김씨를 풀어줬다.

김씨는 지금까지도 ‘그날 개신동에서 당한 기억을 되살리고 싶지 않다’ 며 말을 삼가고 있다. 이밖에 청주 노동운동의 맏형인 김재수씨(40 · 충북대 79 학번)도 군수사대에 끌려가 모진 폭행을 당한 피해자다. 80년 5월 김씨는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수배중이었고 보안부대에서는 김씨를 찾아내기 위해 휴가중이던 김씨 형을 끌고가 추궁하는 등 가족들까지 불안에 떠는 나날이었다.

결국 같은 해 7월 자수하자 계엄하의 수동 보안부대 합동수사부로 연행 됐고 20년 재이활동 중에 가장 혹독한 폭력에 맞닥뜨렸다. “맞는 고통 못지않게 옆방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가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나중에 때릴 곳이 없으면 발바닥까지 맞았고 잠 안재우기는 일상적인 일이었다. 잠도 조사실 시멘트바닥에 신문지 깔고 눕는 정도 였다. 수동에서 함께 조사벋았던 최종철 동료는 이듬해 81년 9월 23살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당시 군수사관들도 종철이가 ‘독종이라서 가장 많이 맞았다’ 는 얘기를 연행자들에게 했었다. 결국 폭력의 후유증이 건강을 악화시켰고 요절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었다고 우리들은 생각한다” 김씨의 설명이다.

폭력장본인, 현직경찰 건재
민주화 운동이후 청주경실련에서 시민단체 활동을 벌여혼 이주형씨(전 경실련 사무처장)도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후유증을 안고 있는 경우다. 84년 사창동 도시산업선교회에서 철거민집단농성을 지원하고 있던 이씨 등을 경찰이 강제연행해 인접한 중앙여고(현 청주외국어고) 운동장에서 집단구타한 사건이다. ‘한밤중에 교회로 난입해서 우리 대학생들을 골라내기 시작했다.

 전경들 구둣발과 곤봉으로 무수하게 맞았고 앞니 2개가 빠지고 몇개는 부서지고 갈비뼈까지 부러졌다. 경찰로 연행된 뒤 새벽녘에야 병원으로 후송시켜줬다. 부상정도가 심하니까, 시내 서울병원에 2개월간 입원시키고 병원장을 통해 치아 치료비로 얼마간을 전해주기도 했다. 5공의 서슬 퍼런 시국이라서 더이상 문제제기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씨는 지금도 흐린날이면 어김없이 허리통증이라는 '날궂이’ 를 겪고 있다.
짧은 취재괴정에서 수집된 군부정권의 고문 · 폭력사건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수준이다.
앞서 밝힌대로 대부분의 피해자들에게는 폭력앞에 굴복하고 애걸한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는 자체가 고통이었다. 한국언론의 '마지막 지사(志士)' 로 손꼽히는 송건호씨(전 한겨례신문 대표)는 과거 동아투위 시절에 정보기관에서 당한 고문폭력의 경험을 얘기 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앞으로 다시 수사기관에 강제연행되더라도 거기서 말한 내용은 아무 것도 믿지 마라. 그 사람들은 여자를 남자로 바꾸는 일 이외에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고문으로 안되는 일 없다
청주에서는 이근안류의 전문적인 고문기술은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물고문이 확인됐고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신체적 후유증과 정신적 황폐함을 호소하는 피해자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이름과 얼굴을 뻔히 알고 있는 악명높은(?) 정보과 직원들이 현직에 안주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울분을 토로했다.

 "유난히 큰손으로 무자비하게 손찌검을 했던 오모씨, 물고문을 주도하며 한치도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김모씨, 불독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김모씨 등은 우리 재야 활동가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사실상 수사과 직원들이 진술을 받아내기 위해 폭력을 가하는 것이 상례인데 정보과 직원들이 왜 그렇게 무지막지한 폭력을 사용했는지 모르겠다”

한편 충북연대측은 오는 12월 충북 지역의 5 · 6공 의문사 · 조작의혹 사건에 대한 자료집을 발간하면서 당시 고문폭력의 장본인으로 지목된 현직 경찰에 대한 실명을 밝히고 피해사례를 공개할 예정이다. 충북연대 실무자는 “고문폭력의 진상이 피해자와 가해 자라는 대립관점에서 보여지는 것은 반대한다. 다만 독재의 역사가 안고있는 음습한 그늘을 있는 그대로 밝히고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는 계기로 삼자는 취지다. 따라서 고문폭력의 장본인들이 진정으로 반셩과 사과를 한다면 똑같은 시대의 피해자로 화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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