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기폭격 시신도 못찾아… 370명 비명횡사

현장② 청원오창면 농협창고

전쟁이 터진 지 열흘 뒤인 7 월 6일 청원군 오창면 일신리. 보도연맹원인 이 마을 최진향 씨(당시 26세)는 논일을 하던 중 지서로 모이라는 동네청년의 전갈을 받고 같은 보도연맹원인 형 진희씨(당시 28서세)와 함께 서둘러 지서로 향했다. 최씨가 보도연맹에 들아가게 된 것은 해방직후 결성된 전국 농민회총연맹 회원이었기 때문이다. 땅 한뙈기 없는 대부분의 소작농에게 토지를 나눠 주고 비료도 거저 준다는 농민 연맹의 선전에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도연맹원이 된 뒤 가끔씩 지서에서 소집점검과 반공홍보 교육을 받아온 최씨는 그달도 ‘으례있는 교육’ 정도로만 생각했다. 오창면과 진천 사석 등지의 마을에서 모인 보도연맹원들은 대략 370여명이었다. 간단한 신원확인 절차가 끝난 뒤 이들은 오창지서 앞 양곡창고에 갇힌 채 군인들의 엄중한 감시를 받았다. 식사는 가족들이 밖에서 들여오는 도시락등 음식을 나눠 먹었으나 비좁은 창고에서 7월의 복더위를 견뎌내는 일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이즈음 진천에서는 남하하는 북한군과 저지하는 국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침내 갇힌지 5일째 되는 7월 10일 자정무렵, 감시 군인들은 밖에서 창고문을 걸어 잠근채 돌연 마을을 떠났다. 3시간쯤 뒤 밖에서 다시 인기척이 들리고 후퇴병력으로 보이는 국군 1개 소대 병력이 문을 열고 자초지종을 물었 다. 사람들은 '이제 살았구나’하고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보도연맹원이란 사실을 알아챈 군인들의 태도가 돌변하기 시작했다.

퇴각하던 아군, 기관총세례
군인들은 막무가내로 기관총 3대를 창고앞에 장전시켰다. 시퍼런 서슬앞에 말문이 막힌 창고안 사람들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잠시후 기관총 소리가 천지를 흔들었고 수류탄까지 던져 창고안은 아수라장이었다. 한차례 사격을 멈춘 군인들은 ‘살아있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일어나면 살려준다’ 고 말한 뒤 엉거 주춤 일어서는 사람들에게 다시 총격을 가했다.

다행히 최씨는 시체더미에 깔린채 허벅지에 관통상만 입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함께 갇혔던 형은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나말고 서너명이 요행히 목숨이 붙어서 살았는데, 군인들 차가 떠나구 한참있다 창고밖으로 기어나왔어. 근데 컴컴한데 집으로 가다가 또 변을 당하면 어떻캬, 논두렁에 숨어서 밤새도록 피를 흘리고 있는데 새벽녁에 비행기가 한대 나타났어. 그러더니 양곡창 고쪽에다 폭탄을 떨어트렸는지 불이 번쩍하더라구, 나중에 식구들이 가보니까, 쑥대밭이 됐다는겨. 그래서 형님 시체도 찾아내지 못한겨”

91년 취재당시 68세의 고령이었던 최씨는 형의 죽음을 말하면서 깊은 눈주름에 눈물을 내비쳤다. 함께 끌려가 혼자만 살아돌아온 죄책감일까, 최씨는 진상규명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고 살제로 충청리뷰 보도이후 일부 유가족들과 위령탑 건립문제를 논의했으나 결말을 보지 못한채 93년 5월 한많은 이승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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