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 우홍원씨 인터뷰

"첨엔 나만 살아나온게 미안해서, 죽은 사람 집식구들 마주치는게 고역이었어. 형제들이 몰살한 집도 여럿되는데 나만 돌아왔으니 답답할 노릇이지. 끌려간 39명 중에 결혼한 사람이 절반쯤 됐으니까 한 20호는 하루아침에 가장이 없어진겨’' 전쟁당시 50가구 정도에 불과했던 마을에서 30여명의 남정네가 떼죽음을 당한 셈이다.

결국 자식없이 생과부가 된 부인들은 재혼하기도 했고 홀몸으로 자식들을 기르며 평생을 수절 한 경우도 많았다. 당시 남편을 잃고 고생 끝에 남매를 출가 시키고 홀로 사는 마을 할머니를 찾아갔다. 하지만 기자를 외면한채 단호하게 취재를 거부했다.

"지금와서 뭐 할라고 그 얘기를 하나, 스물다섯에 혼자돼서 빨갱이 오해받고 온갖 수모겪으며 살아왔는데…. 다 잊어 버렸고 말도 꺼내기 싫어. 그 얘기라면 다시는 우리 집에 찾아오지 마요” 할머니에게는 공학박사가 된 아들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때 그 사건을 ‘수치’ 라고 표현했다. 죽은 사람의 그늘에서 ‘빨갱이 가족’ 으로 숨죽이고 지냈던 세월을 돌아보고 싶지 않은 듯 했다. 아직도 사담리에 남은 50년전의 상흔은 흠력 6월초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다. 외지에 나가있는 자손들이 모여들어 마을어귀까지 차량이 들어 서면 명절풍경과 흡사하다. 하지만 아버지, 남편, 형제의 죽음에 대해 가족들간에도 말을 삼간다 무지한 농민들에게 씌워진 보도연맹의 ‘원죄’ 가 아직도 망령처럼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