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간 '피의 사육제' 780명 총살…대부분 농민

현장 ① 청원북이면 옥녀봉

1950년 6월말, 괴산군 사리면 사담리. 백여호의 농가가 보광산 자락에 홍기종기 둘러선 마을에는 며칠전부터 나돌기 시작한 전쟁소문으로 뒤숭숭하기만 했다. 모내기를 끝내고 한시름 덜고 지낼 즈음, 느닷없이 닥친 북한의 남침소식에 우홍원씨(77세 · 당시 27세)는 심란했다.

“그땐 동네에 라디오가 있는 집도 없었어. 그저 소리소문 듣고 전쟁이 났나보다 걱정했었는데, 나중엔 국군이 오히려 쳐들어 가고 있다고 방송에 나왔으니까 어느 말이 맞는지 답답하기만 했지”
실제로 서울 중앙방송은 국민들에게 초기 전황을 왜곡보도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파죽 지세로 밀려오면서 서울 정부 기관들이 대전으로 이삿짐을 싸는 동안에도 한국군의 선전과 38선 이북북상을 알리고 있는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전시상황에서 민심의 급격한 동요를 우려한 선무공작의 한 방법이었다.

우씨는 자신을 생과사의 갈림길에 서게 했던 49년전의 그날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날 점심때 논일을 마치구 집에서 밥상을 물리는 참에 지서에서 사람이 잦아왔어. 경찰 서장이 특별강연을 한다는 거여. 그런가 보다 싶어서 따라 나섰지” 이날 우씨처럼 사리지서로 불려온 마을 남자들은 모두 39명. 이들은 전쟁통에 경찰서장이 새로운 소식이라도 전해줄까 싶어 궁금한 마음뿐이었다. 모여든 사람들이 하나 같이 보도연맹원이라는 사실도 평소의 반공교육 소집으로 여겨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경찰이 마을마다 소집통보
경찰은 지서마당에서 인원 점검을 마친 뒤 곧바로 큰길 옆에 세워둔 군용트럭에 타도록 지시했다. “그때 트럭에 타기 전에 지서주임이 변소 같다올 사람들은 얼른 가서 볼일을 보라고 했어. 기다리는 사람한테 미안해서 몇사람만 얼른 갔다왔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그때 지서주임이 도망갈 기회를 준거여. 근데 농사꾼들이 그런저런 눈치를 아나, 먼저 피난시켜 준다고 하길래, 아무 생각없이 따라 간거여” 트럭은 4km쯤 떨어진 증평읍내로 접어들었고 양조장 창고(현 조흥흔행 뒷편) 앞에 멈춰섰다. 이런 식으로 증평양조장 창고
와 여기서 200m 떨어진 농협창고에 갇히게 된 사람틀은 모두 400여명에 달했다.

“첨엔 이거 뭔가 이상하다 싶었어, 그런데 하룻밤만 자면 다들 집에 보내 준다고 하는거여. 그런데 다음날부터 밖에 지키고 있는 순사들이 대우가 싹 달라지는게 ‘정말 큰일났구나’ 싶더라구. 보도연맹들을 몰살시킬라구 한다는 얘기가 창고안에서 퍼지기 시작한거여”
우씨는 꼬박 일주일동안 비좁고 컴컴한 창고안에서 죽음의 예감속에 마흠을 졸여야 했다.

식사라고는 하루에 아침저녁으로 주먹밥 한덩이씩이 고작이었대 또한 30평 남짓한 공간에 200명 가량의 사람들이 갇혀있다보니 밤에도 무릎을 세우고 앉은채 선잠을 잤다.
외부출입이 일체 통제된 상태에서 대소변도 창고안에서 해결하다보니 말그대로 ‘돼지 우리’ 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군경가족 ‘황천길’ 면해
마침내 1주일쯤 경과된 날, 헌병과 경찰들이 삼엄하게 둘러선채 사람들은 가려내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전에 군입대 한 동생이 숨지는 바람에 원호 가족이 된 우씨는 다른 군경가 족 5~6명과 함께 창고에 남겨졌고 나머지 사림들은 모두 두손을 뒤로 결박지운채 트럭에 실렸다.

"비가 억수루 내리는 날이었어. 번개가 번쩍거리구…, 비들을 흠뻑 맞구 트럭에 타는걸 보니까, 정말 죽으러 가는가 보다 싶었어.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총든 군인들이 워낙 독이 올라 있어서 서루들 말한마디 못하구 끌려간거여." 우씨와 군경 가족 보도연맹원들은 3일간을 더 창고에서 지낸뒤 가까스로 풀려났다.
이날 장대비 속으로 끌려간 400여명의 보도연맹원들은 어떻게 처형됐는가? 충청리뷰는 94년 취재당시 수소문 끝에 이들의 집단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시신까지 수습한 장본인을 찾아냈다. 증평읍에서 2km가량 떨어진 청원군 북이면 내추리에 사는 윤기병씨 (취재당시 79세 · 작고)는 ‘악몽같흔 그날’ 을 생생하게 기억 하고 있었다.

"아마 7월 5, 6 일쯤 됐을껴, 북이지서에서 의용소방대는 다 모이라고 연락이 왔어. 그때 벌써 피난간 사람들두 있구해서 세사람밖에 못 모였어. 지서주임이 잠깐 일좀 거들어 줘야 된다면서 옥녀봉으로 데려가더라구’'
지서주임과 윤씨 일행이 옥녀봉 골짜기로 들어선 때는 점

심무렵이었다. 골짜기에는 이미 군인과 경찰등 40여명이 소총과 기관단총으로 무장한채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후 인근 내수국교 앞으로 통하는 국도쪽으로 보도연맹원들흘 실은 군용트럭이 속속 도착했고 죽음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사람들이 숱하게 내렸어. 새끼줄로 앙손을 뒤로묶고 옥녀봉 골짜기를 넘어오면 열명씩 스무명씩 세워놓고 총들을 쏴댔지. 난 처음엔 군인덜이 미친게 아닌가 생각했어. 다들 행색이 농사꾼들 같은데 왜 개잡듯하느냐 말여”

홍명희 養母도 총격사망
이날 ‘피의 사육제’ 는 3시간 동안 계속됐고 다음날에도 또 한차례 살상극이 벌어졌다.
윤씨는 당시 피살자의 총인원을 인솔장교의 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 전부 780명이죽었다고 보고하는 걸 옆에서 들었어. 거의 젊은이들이 많았고 전부다 넋이 빠져서 그냥 끌려와 끌려와 죽더구만…, 자기 ‘엄니’ 를 부르다 죽는 사람두 있구 ‘인민공화국 만세’ 를 하다가 죽는 사람도 하나 있었어”

또한 윤씨는 중요한 사실을 엿듣게 됐다. 그동안 한국전쟁 직전 북한에서 부수상까지 지냈던 월북작가 홍명희의 어머니가 연행자 가운데 포함됐다는 사실이다.
당시 괴산군 칠성면 생가에서 끌려온 것으로 추정되는 홍씨의 어머니 조모씨(당시 74세)는 하얗게 젠 머리에 소복처럼 흰 한복을 입고 현장에서 외따로 총살당했다는 것.

“곱게 늙은 할머니였어. 총을 맞고 구덩이에 쓰러지니까, 군인들이 손가락에 금가락지를 전부 빼가더구만. 집에서 붙잡혀 올 때 일부러 금붙이를 전부 끼고 온 모양이여”
이틀간의 살상극이 끝나자 윤씨와 일부 주민들은 사살된 700여구의 시신을 골짜기 가운데로 한데 모아 매장도 하지 못한채 대충 흙으로 가려덮었다.

2~3일 뒤 인근 국도를 지나던 피난민들이 참혹한 현장를 보다못해 맨손으로 흙흘 퍼 시신을 묻기도 했고 뒤늦게 소식을 전해들흔 유가족들은 아들, 남편의 유해를 찾느라 아우성이었다. 괴산군 사리면에서 끌려온 보도연맹원들의 가족들도 뒤늦게 소문을 듣고 찾아와 시신 을 수습하기도 했다. 취재결과 옥녀봉에서 숨진 사람들은 괴산군 칠성면 · 사리면과 증평읍을 비롯해 청원 북이면 일대에서 연행된 보도연맹원 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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