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손으로 저지른 또 하나의 양민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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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손으로 저지른 또 하나의 양민학살…
  • 권혁상 기자
  • 승인 1999.10.16 1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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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 집단학살, 군-경에의해 조직적으로 벌어져
도내 생존자 목격자 증언… 2000명이상 학살 밝혀져

최근 AP통신의 보도로 인해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이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동안 발뺌으로 일관 해온 미국 정부는 뒤늦게나마 한미합동조사단을 구성해 적극적인 진상규명 작업을 벌이겠다고 약속했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중에 자행된 무수한 양민학살의 한사례에 불과하다. 정작 우리 정부는 노근리보다 더 심각하고 참혹한 양민학살 사건을 50년째 외면하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직후 후퇴하는 국군에 의해 자행된 ‘국민보도연맹 집단학살사건’ 이 바로 그것이다. 충청리뷰는 지난 94년 6월호의 '6 · 25 특집기획’ 을 통해 노근리 사건과 함께 충북도내에서 확인된 보도연맹 학살현장을 심층보도했다.

 생존자, 목격자 증언을 토대로 최소한 2천명 이상의 희생된 것으로 파악됐다. 특히 보도연맹 집단학살은 전시상황에 대비한 사전계획에 의해 군인 · 경찰에 의해 전국적 · 조직적으로 벌어진 ‘예방학살’로 분석했다. 이제 국민의 정부는 수만명의 무고한 양민이 숨져간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대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 내 눈의 들보를 외면하고 남의 눈의 티를 탓할 수만 없고 역사속에 영원한 비밀은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죄악 가운데 가장 비참한 것이 전쟁이다.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퍼붓는 무차별적인 폭력과 살육전은 원시부터 현대의 문명사회에 이르기 까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우리 한반도에도 무수한 전쟁의 역사가 이어졌다.

특히 1950년 한국전쟁은 동족상쟁이라는 성격과 엄청난 인적 · 물적피해로 인해 그 비극성을 더하고 있다. 특히 세계 전쟁사에는 군인보다 민간인 희생자가 더 많았던 전쟁으로 기록 되고 있다. 북한을 포함, 230명의 군인이 사망한 반면 민간인 사망 · 실종자가 430만명에 달해 정규군보다 2배나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민간힌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는 전투과정에서 숨진 것이 아니고 비무장상태로 학살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국군은 전쟁발발 직후 서둘러 후퇴하면서 괴거 좌익단체에 가입했던 보도연맹원들을 적의 동조 세력으로 간주해 집단학살했다.

10만명이상으로 추정되는 자국민을 무참하게 살해한 이 사건에 대해 우리 정부는 50년간 침묵을 지켜왔다. 당시 보도연맹 학살극의 생존자들은 대부분 세상을 떴고 유가족 들은 평생 ‘빨갱이’ 라는 세 글자를 천형(天刑)처럼 가슴에 새기고 살아왔다. 우리 정부의 진상규명 노력을 촉구하면서 94년 충청리뷰 보도내용을 중심으로 보도연맹 학살사건을 재조명해본다.

이데올로기 산물, 보도연맹
해방직후부터 48년 남한정부 수립때까지 3년동안 북한에는 김일성이 주도하는 사회주의 인민공화국 정권수립이 순조롭게 진행됐다. 하지만 남한지역은 미국의 군정통치하에서 이념논의가 자유롭게 허용된 상태였다. 남노당등 좌익계의 활동이 농촌지역에까지 파급됐고 한민당과 군경조직을 기반으로한 우익과 긴장, 갈등관계가 상존했다.

이때부터 민족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은 골이 깊어졌고 국제질서의 양대축인 미 · 소의 영향권에 속해있던 남북한 정권은 이를 권력구축의 수단으로 삼게됐다.
남한은 이승만정권 탄생직후 반공법을 제정해 모든 좌익 활동을 불법으로 규정했고 이들의 주도세력은 지하로 스며 들었다.

이때 정부가 좌익단체 가담자들에게 내린 면죄부가 바로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 이다. 49년 10월 지방의 면단위까지 결성된 보도연맹은 과거 조선민주주의 민족 전선, 농민조합총연맹등 좌익 단체에 가입한 전력이 있는 사람들이 대상이었다. 가입하면 지난날의 좌익가담 행위를 불문에 부치고 민주주의의 우월성을 계도해 사상개조를 시키겠다는 취지였다.

전국 30만명의 보도연맹원들은 지역별로 서너차례 소집돼 반공강연을 듣는 것이 고작 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과 함께 북의 동조세력을 우려한 남한정부는 이를 차단하기 위해 전국적인 예방학살을 시도했다. 기습공격에 숨돌릴 겨를이 없었던 국군은 한강이남 지역부터 보도연맹원에 대한 집단학살을 시작했다. 한국전쟁 사학자들은 30만명에 달했던 보도연맹원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쟁으로 운명바뀐 보도연맹
특히 도내에서 희생된 보도 연맹원의 대부분은 무지한 농민이었다. 좌익 농민단체에서 ‘가입만 하면 좋은 세상에서 농지분배를 받아 잘 살수 있다’ 고 현혹하자 무작정 가입원서에 도장를 찍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관할 경찰서에서 ‘피난을 시켜주겠다’ ‘전시상황을 알려주겠다’ 는 말만 믿고 모였다가 외딴 장소로 끌려가 몰살을 당했다.

이로인해 전국 곳곳에는 한날 한시에 제사를 지내는 보도 연맹 ‘과부촌’ 이 생겨났다.
충청리뷰는 청주, 청원, 괴산, 보은, 혹천에서 보도연맹원의 연행과 학살현장를 확힌 했다. 청원 북일면 옥녀봉에서는 780여명이 총살당해 도내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오창면 농협창고에 갇혀있던 370여명의 보도연맹원들도 퇴각하던 아군의 기관총에 맞아 몰살 당했다. 괴산 · 진천 · 증평지역 보도연맹원들의 죽임을 당한 2곳의 학살현장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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