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오른 봄이 산 정수리를 기어오른다. 진달래 개나리에 이어 산수유, 산 벚꽃이 꽃봉오리를 슬슬 내민다. 종달이가 봄의 한 자락을 베어 물고 상당 산성을 한바퀴 돈다. 사시사철 불과 연기가 피어오르던 것대산 봉수터엔 연기대신 아지랑이가 굼실댄다.

산성고개를 너머 왼쪽으로 접어들면 상당산성이요, 오른쪽으로 길을 잡으면 것대산 봉수터와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으로 가는 길이다. 상춘객의 발길은 대부분 상당산성으로 꺾어들지만 고즈넉한 역사의 향기는 것대산에도 넉넉히 배어있다.이곳이 조선시대의 국도인데다 길목마다 전설이 널려 있고 것대산 봉수터에선 역사의 향불이 행인의 가슴 속에서 여전히 피어 오른다.

일명 거질대산이라고도 부르는 것대산 봉수는 육지의 봉우리를 연결하는 내지봉수(內地烽燧)로 오늘날로 치면 통신사 중계소 역할을 했던 것이다. 전화, 인터넷, 휴대폰이 없던 시대이므로 봉수가 가장 빠른 통신 수단이었다. 밤에는 불을 피워 신호를 보냈는데 이를 봉(烽)이라 했고 낮에는 연기를 피워 수(燧)라 했다. 연기나 불빛이 잘 전달되기 위해서는 토끼, 노루 등 짐승의 배설물을 섞어 태웠다고 한다.

봉수의 숫자에 따라 위급상황을 달리했는데 시대에 따라 그 방법이 약간 다르나 봉수제도가 비교적 체계를 갖춘 세종때에는 5거화법(五擧火法)을 따랐다. 내지봉수의 경우 1거면 평상, 2거 적 국경밖 출현, 3거 변경 가까이 접근, 4거 국경침범, 5거 접전 등으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일기불순 및 근무태만 등으로 신호가 끊기거나 잘못 전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오죽하면 임진왜란 당시에도 봉수가 오르지 않았을까.

전국적으로 봉수는 약 5개노선으로 구성되고 서울 목멱산(남산)에서 집결하였다. 청주권을 통과하던 봉수망은 내지봉수의 중요한 루트였다. 추풍령을 넘어 온 봉수는 황간~옥천~회덕 계족산을 거쳐 문의 소이산~청주 것대산에 이르렀다.것대산 봉수는 진천 소흘산~음성 망이산 봉수대로 불빛을 넘겼고 망이산 봉수대는 여기서 문경새재를 넘어온 봉수를 합쳐 경기도로 이첩하였다.

것대산 봉수터에는 애절한 전설이 한토막 남아있다. 이인좌의 난때 반군은 상당산성을 점령했고 통신수단인 것대산 봉수터를 차단했다. ‘목노인’이라는 봉수지기는 딸 선이와 사윗감인 백룡과 함께 살았는데 반군이 들이닥쳐 목노인을 살해하였다.

선이는 반군의 소행임을 직감하고 봉수를 올려 이를 알리려 했으나 반군은 선이마져 죽였다. 청주장에 돗자리를 팔러간 백룡이 집에 돌아오자 장인과 선이가 죽어 있었다. 이에 격분한 백룡은 쇠스랑으로 반군을 죽이고 봉수를 올렸다. 그리고 목노인과 선이를 봉화에 화장하였다.그런데 오늘날 것대산 봉수터에는 ‘강씨 문중’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봉수터는 사방이 잘 보이는 명당자리이므로 아마 묘자리로 선택한 모양이다.

충주의 심항산(계족산) 봉수터에도 묘자리가 있다.이 문제를 두고 청주시와 강씨 문중사이에 갈등이 있어왔지만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봉수대의 복원에는 묘자리의 이전이 필히 선행돼야 할 과제다. 이 것대산을 통과하는 옛길은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처럼 약 1백년간 가지 않은 숲속의 길(The Road not Taken)이다.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