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진상' 알리려던 인사들
신군부에 잡혀 고난의 옥살이
97년 '5 · 18 보상법' 적용으로
청주 김창규목사 등 6명 명예회복

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올해로 5 · 18 광주민주화운동 19돌을 맞았다.
총칼을 앞세운 5공 신군부의 무력 쿠테타에 맨몸으로 맞서 싸웠던 광주, '간첩’ ‘폭도’ 로 매도당한 채 죽어 간 수백명의 영혼들. 하지만 군사정권의 철저한 언론통제로 수많은 동포들은 광주학살극의 신음소리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80년 5월, 대한민국은 눈멀고 귀 멀고 입까지 막힌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해 5월, 충북 청주에서도 신군부의 음모에 맞서 민주화운동의 불길을 당긴 사람들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만들어낸 학도호국단 체제를 깨고 '민주화의 봄'을 꽃 피우기 위해 대학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나선 것이다.

또한 5 · 18 광주민주화훈동이 수습된 직후 광주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 유인물을 들고 청주시내로 나섰던 이도 있었다. 이들은 군사법정에서 계엄포고령 위반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고난의 옥살이까지 하게 됐다.
마침내 '5 · 18 광주사태'는 김삼삼 정권 출범으로 진상규명과 함께 ‘광주민주화운동’ 으로 자리매김됐고 김대중 정권은 명예회복 및 보상대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말 청주에서도 80년 5월 ’당시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6명의 민주인사들이 5 · 18 보상법에 따라 보상금을 지급벋았다.
5 · 18 보상법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사망, 실종, 부상자나 계엄선포 기간에 민주화운동으로 체포, 구금된 상이자들을 대상으로 피해정도에 따라 적절한 보상금을 지급토록 한 제 도다.

청주에서는 김창규목사(민족화합운동 충북연합 상임대표), 김재수씨(당시 충북대 3년 · 전 민노총 충북본부 사무처장), 고 최종철씨(당시 부산대 3년 휴학), 민봉규씨(당시 충북대 재학), 김용명씨( 당시 청주대 재학), 조순영전도사(여 · 도시산업선교회)등이 해당됐다.

80년 5월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재수씨등 4명은 ‘계엄해제’ ‘조기선거’ 등을 주장하며 학내외 시위를 주도했던 인물들이다.
특히 고 최종철씨(이하 최씨)는 보안부대의 고문수사와 흑독한 옥살이 후유증으로 인해 81년 9월, 2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최씨의 짧고도 억센 개인사를 되짚어 본다.
최씨는 청주 영운동에서 태어나 고교까지 마치고 부산대에 입학했다.
80년 대학 3학년 재학중 군입대를 위해 휴학계를 내고 청주로 올라 왔다.
최씨는 충북대 학생운동권으로 활약하던 친구들과 만나 시국상황을 토론하고 각종 집회에 주도적으로 참여 했다. 최씨는 80년 5월 7일 · 14일에도 충북대 인근에서 400여명의 대학생들과 함께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같은 시위 주도로 인해 계엄포고령 위반죄로 몰려 수배가 떨어졌고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 이후 서울 고모집으로 몸을 피했다.
당시 최씨의 아버지인 최재홍씨는 충북도청의 말단 공무원이었다.

“난 종철이가 데모를 하는 줄도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형사들이 집으로 들이닥쳐 종철이를 찾는 바람에 알게됐다. 매일처럼 담당형사가 찾아 와 집에 살다시피 했는데, 더 못견디는 건 직장상사들의 압력이었다. ‘공무원 자리 유지할려면 아들을 빨리 자수 시키라’ 고 성화를 하는데, 완전히 직장에서 죄인이 된 심정이었다"
전 가족의 생명줄인 직장마저 잃흘 처지에 놓인 아버지 최씨는 결국 서울에 있는 아들를 지신이 자기 손으로 끌고와 청주경찰서에 자수시켰다.
당시는 계엄 상황이었고 최씨는 곧장 청주 수동에 자리잡은 보안부대의 합동수사부로 넘겨졌다. 일단 지하 조사실로 들어서면 옷을 벗기고 군복으로 갈아입힌 다음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다.

“종철이 형흘 대전교도소에서 만났는데 그때 목욕탕에서 보니까, 온몸 에 멍자국이 안난 곳이 없었다. 나중에 때릴 곳이 없으니까, 발바닥까지 때렸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도 거기서 발바닥을 회초리로 맞아봤는데, 계속 몇시간을 맞다보면 가느다란 회초리 한 대가 마치 몽둥이로 때리는 것처럼 혼몸흘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김재수씨의 증언이다.

최씨는 80년 9월 대전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고 항소 마저 기각당했다. 대전과 서울 영등 포교도소에서 11개월간 수감생활을 하던 중 81년 5월 석가탄신일 가석방 대상자로 풀려났다. 마침내 몸은 자유를 얻었지만 결코 ‘자유로운 몸’ 이 아니었다.

"애가 살도 쏙 빠지고 건강이 말이 아니었다. 혼자 쉬면서 약도 먹고 요양하라고 서울 고모집으로 보냈는데 몇 달만에 죽었다고 연락이 왔다"
출감한 지 4개월만인 81년 9월 1일 최씨는 고모집에서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을 거둔 상태였다.

사인은 심장마비, 하지만 사체부검을 지휘한 검찰은 아버지 최씨에게 화장을 하도록 지시했다는 것. 결국 숨진 최씨는 시신마저도 고향 땅에 묻히지 못한채 벽제 화장터에서 한 재로 뿌려지고 말았다.
"청주에 집안 선산이 있지만 검사 가 화장를 하라니, 할 수없이 그렇게 했다. 죽은 종철이 생각날까봐, 애가 쓰던 물건도 모두 태워버렸다. 이제 생각해보면 종철이 흔적을 하나도 남겨두지 못한 것이 가장 가슴아프다”

아버지 최씨에게는 ‘둘째 아들’ 이 생전에는 씻지못할 가슴 속의'한' 이 돼버렸다.
23년의 짧은 생에 아무런 흔적조차 남지지 못한 최씨였지만 이 땅의 민주화를 몸바쳐 갈망한 고인의 뜻은 결코 잊혀지지 않았다.

84년 11월, 고인와 함께 청주지역 민주화운동을 이끌었던 동료들이 청주 용암동에 추모비를 건립하게 된 것이다. 고인이 생전에 신도로 있던 제일교회의 이쾌재목사가 교회묘지에 자리를 내주었고 강희남 목사가 비문을 썼다.하지만 이 자리에도 고인의 아버지는 참석하지 못했다.

“남의 이목이 두려워 차마 가볼 수 가 없었다. 추모비 세우고 이듬해에 교회묘지 길목까지만 갔었다. 그것도 형사들이 '재인사들이 묘지에서 종철이 추모행사를 하고 데모도 한다는 데 당신이 가서 말리라’ 며 끌고가는 바람에 길목까지 가서 기다린 적이 있다. 그때 내 심정이 어땠겠는가? 결국 89년도에 공무원 퇴직하구나서 처음으로 종철이 비석흘 찻아갈 수 있었다"

마침내 아버지 최씨는 지난 4월, 광주 5 · 18묘역에 세워진 고 최종철 씨의 묘비에 직접 비문을 쓰게 됐다.
또한 98년 8월 청주지법에 재심 청구소송을 제기해 무죄판결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당시 재판부는 ‘피고인이 한 행위는 헌정질서 파괴범죄를 저지하거나 반대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 기본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치활동’으로 규정, 포고령위반에 대해 무죄선고를 한 것 이다.

최씨의 돌연한 죽음에 대해 지역 민주인사들은 한결같이 고문수사와 옥살이 후유증흘 원인으로 들고 있 다.
"80년 계엄때 청주 보안부대에서 조사받은 사람중에 가장 많이 맞은 사람이 종철이라고 부대원들 임에서 나올 정도였다. 나도 그때 지하 조사실에서 종철이의 비명소리를 직접 들었다. 1개월가량 고문수사를 하면서 가족들은 면회조차 시켜주지 않아 군사법정에서 만나 볼 수 있었다. 또 영등포교도소에서 순화교육 반대등 양심수 수형생활 개선을 위해 싸움을 하느라 몸을 많이 상했다" 김창규목사의 설명이다.

/ 권혁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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