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는 길' 등 발표… 평생 독신 문필가로 치열한 삶 살아

청주문학, 민병산의 삶과 문학 특집 마련
구중서 시인은 민병산선생을 가리켜 "선생은 거리의 철학자, 한국의 디오게네스, 영원한 선배요, 스승이요, 마음의 고향 같이 편하고 다정했던 분"이라고 추억한다.

신경림 시인은 '인사동 1'이라는 시에서 민병산 선생을 애도하며 다음과 같이 썼다.
"허름한 배낭 어깨에 걸고/ 느릿느릿 걷는 그의 별난 걸음걸이는/ 이제 인사동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귀천 또는 수희재에 앉아/ 눈을 반쯤 감고 어눌한 말소리로/ 지나가듯 토하는 날카로운 참말도/ 더는 인사동에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청구자(靑丘子) 민병산. 청주에서 알아주는 민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회갑을 하루 앞두고 일생을 마감하기까지 철학과 문학을 마음껏 즐겼던 그를 오히려 고향 청주에서는 기억하지 못 하고 있다.
대신 신경림, 구중서 씨 등 중앙문단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 자주 그를 추억한다.
청주에서 왔다고 하면 문인들이 "민병산을 아느냐"고 할 정도다.

특히 지난해는 그가 타계한 지 10주기 되는 해였다. 충북 민예총 문학위원회가 ‘청주문학’ 98년 겨울호에서 이를 기념하고 민병산의 정신을 되새겨 보기 위해 민병산의 삶과 문학 특집을 마련해 눈길을 끈다.
비록 세상이 떠들썩 할 정도의 작품을 남긴 것은 아니었지만 일찌감치 세속적 인연을 끊고 철학자로 살아온 그를 두고 아는 사람들은 ‘청주의 정신적 지주’ 라고 표현한다.

새벽 12월호에 '사천세의 소아마비증’을 게재하여 필명을 떨침.
이후 새벽, 사상계, 세대 등의 잡지에 여러 논문과 에세이를 발표하여 문필가로서의 자리를 잡음(33세).
‘철학하는 길’ ‘철학의 첫걸음’ 등을 새교실 철학의 즐거움 란에 연재(36세). ‘소크라테스’ 외 9명의 전기를 女像에 발표(38세). ‘지식인 雜記’ 를 창작과 비평 봄호에 발표(41세). 제1회 민병산 붓글씨전 개최(58세). 민병산 산문집 ‘철학의 즐거움’ 발행(타계 후).

그의 흔적를 얼핏 적어보아도 그가 일생동안 얼마나 열심히 문필가로서의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그는 당시 대한일보, 독서생활, 다이제스트, 중앙일보, 서울신문 등에 각종 논문과 에세이를 부지런히 발표했다.
선생은 1928년 9월 청주시 북문로1가 50번지, 충북 제일의 부호 민구관댁으로 불리는 집에서 태어났다.
구한 말에 괴산군수와 청주군수를 지낸 민영은이 큰 할아버지였고 부친은 와세다대학 정경학부를 나온 최고의 엘리트였다.

동생 민병구씨는 현재 충북도교육청 초등교육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러나 정작 집 안의 장남인 그가 세상을 떠날 때는 독신주의자로 집 한 채가 없었다.
34년 영정소학교(현 주성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서울로 이사, 혜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어 보성중학교와 동국대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한다.

그후 청주에서는 충북신보사(현 충청일보) 편집부 기자, 청주상고 강사 등을 지냈다.
각별히 친했던 사람으로는 시인 신동문과 민영, 소설가 김문수, 사회운동가 최병준(현 청주시민회장)씨 등이었다고 ‘청주문학’ 은 전하고 있다.

선생은 44년 독서회 사건으로 7개월간 혹살이를 한다.
그리고 57년 1월에는 문학 미술 연극 음악 문학 등 예술장르가 망라된 충북문화인 협회(현 충북예총)의 결성에도 참여했다.

하지만 나름대로 편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가진 그였으나 일생을 독신으로 살며 독서회 사건, 6 · 25 한 국전쟁, 조부의 죽음과 집안 간의 갈등 등 아픈 경험도 많이 했다.
구중서 시인은 그를 가리켜 "선생은 거리의 철학자, 한국의 디오게네스, 영원한 선배요, 스승이요, 마음의 고향 같이 편하고 다정했던 분"이라고 추억했다.

또 한 때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옛 독립문 앞에서 선생과 함께 하숙을 했던 희곡작가 임찬순씨는 "철학가였고 사학자였으며 문인이셨던 분, 바둑과 독서와 문필로 일생을 고고하게 살아 후진들에게 더 없는 존경과 신화를 남기신 위대한 산이셨던 분"이라고 그를 회고하며 "선생은 철학, 역사, 문학 분야에 통달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스포츠, 바둑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은데가 없었다"고 말했다.

서울 인사동 찻집과 칼국수 집 등 그가 단골로 다니던 곳에는 지금도 그의 글씨가 걸려 있다. 항상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재주가 있었던 그의 주변에서는 문학과 철학이야기가 벌어지곤 했다는 것이 지인들의 말이다. 그래서 선생의 고향인 청주에 비석 하나 없는 점을 당시 자주 어울렸던 사람들은 아직까지 아쉬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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