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은행 '탄생에서 합병까지…'

70년 11월 정주영ㆍ민철기 씨 등 발기인총회
주주 30명ㆍ자본금 2억5천만원으로 출발
주식 배당률 20%…79년 대봉산업부도로 첫 위기

충북은행이 설림 28년만에 향토은행의 역사를 마감하게 됐다.
도민들에게 사랑받는 ‘단짝은행’으로 거듭나려는 노력이 지난 2일로 물거품이 되버렸다.
지난해 정부의 금융권 구조조정 ”방침 이후 끊임없이 퇴출, 합병설에 시달렸던 충북은행은 이제 우리 지역의 흘러간 한 역사로 남게 됐다.

충북은행의 탄생과 역경 그리고 합병까지의 과정을 되짚어본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지역자본을 집대성하여 그 지역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내자동원의 극대화를 위해서는 지방은행의 설치를 검토 추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에따라 같은 해 대구 · 부산은행이 최초의 지방은행으로 출범했고 이듬해 광주은행이 문을 열었다.
충북의 경우 70년도까지 충남북을 영업구역을 하는 충청은행이 지방은행으로써 청주, 충주에 2개 지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밖에 한일 · 조흥 등 시중 은행과 한국은행을 포함해 도내에는 11개 은행이 14개의 점포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도내 예금은행의 총예금은 106억 원에 불과해 전국 예금 7839억원의 1.4%에 지나지 않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지역상공인들은 도내 시중은행의 예대율(예금과 대출의 비율)이 40%대에 머물러 지역자금의 역외유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향토은행의 1당위성이 공감대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충북은행 탄생설회의 시발점은 일본 동경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열린 'EXPO70'에 충북의 상공인들이 대거 참석하게 됐고 이때 충북 출신의 재일교포 사업가인 박승국씨(일명 박용구)를 만나게 된 것.

박씨는 충북도의 지방은행 설립에 큰 관심을 나타냈고 곧이어 청주를 직접 방문해 정해식 지사와 지역의 유력 정치인인 육인수 의원를 만났다.
이때 박 씨가 개인출자를 확약함에 따라 지역 은행 설립 추진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마침내 70년 9월 충북지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주식회사 충북은행 설립 준비위원회’를 구성, 도 담당직원과 청주상공회의소 관계자들이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우선 충북출신 경제인을 대상으로 출자예상자 명단을 작성했다.
그리고 서울, 도대 일원을 돌면서 개별적으로 만나 설립취지를 설명하고 출자를 권유했다.
먼저 재일교포 박씨가 1억원 출자를 약속했기 때문에 나머지 1억5천만원을 우리 힘으로 만들기로 했다.

그때 서울에 올라간 것만도 52번이었다” 당시 청주상공회의소장을 맡았던 김우현 씨(78)의 회고담이다.
같은해 11월 충북은행 발기인 총회를 개최했고 발기인 15명 가운데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김성곤 전 공화당 국회의원 등 이채로운 인물도 있었다.

이밖에 민철기씨(전 신흥제분 대표), 김종호 씨(전 한국도자기 대표), 이도영씨(전 일신산협 대표), 박용학씨(전 대농 대표), 김준철 씨(청석학원 소유주) 등 지역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설립당시 발행할 주식 25만주(1주당 1천원) 가훈에 발기인이 22만주를 인수하고 3만주는 일반공모 주식으로 15명의 주주들에게 돌아갔다.

결국 30명 주주가 2억5천만원의 설립자본금을 모은 것이다.
1971년 3월 개점 초기업무를 담당할 신입행원 33명을 선발하고 지금의 청주상공회의소 건물에서 1개월간의 실무연수 교육을 실시했다.
같은 해 4월 24일 도민의 숙원이었던 충북은행이 청주 북문로1가 사무실(현 대우증권 자리)에서 성대한 개점식을 열었다.

당시 남덕우 재무부장관, 신범식 문화공보부장관이 내빈으로 참석했고 박 대통령은 관례에 따라 금일봉으로 제1호의 예금고객이 됐다.
개점 당일 총예수금은 설립자본금의 절반이 넘는 1억4천8백만원에 달해 도민들의 뜨거운 관심과 성원을 그대로 다타냈다.

특히 충북 출신의 신범식 장관이 타부처에까지 지원사격에 나섰고 육인수 의원과 정해식 지사의 노고도 첫 손가락에 손꼽혔다.
10개 지방은행 가운데 마지막으로 태어난 충북은행은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에 힘입어 설립초 꾸준하게 업적신장을 이루어냈다.

78년 12월 제15기 결산에서는 당기 순이익이 18억4천만 원에 달해 주식 배당율이 20%를 기록하는 전무후무한 실적을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79년 하반기 제2차 석유파동으로 국내경제가 침체의 늪에 빠진데다 당시 최대 대출업체인 서울 대봉산업(주)이 부도를 내고 3백억원이 부실채권으로 남게되자 회복불능의 상태가 되버렸다.

 당시 대봉산업은 피혁제품 수출업체로 급성장하면서 76년 6월부터 충북은행 서울지점과 외국환 거래를 시작했다.
 여신거래 규모도 초기에는 5억원에 지나지 않았으나 부도 시점인 79년 4월에는 366억원으로 늘어났다.
 충북은행 자본금의 12배에 해당하는 여신규모였으나 대부분 신용으로 취급되고 일부 담보물건도 다른 은행이 선순위 채권을 갖고 있어 실질적인 채권회수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김재헌 행장을 비롯한 임원진 5명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고 기구축소 등 본격적인 경영합리화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자력회생은 역부족이었고 정부당국에 결손보전을 위한 대책마련을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80년들어 한국은행은 500여억원을 충북은행에 특별지원했고 대봉산업의 부실채권를 대손상각하여 경영 정상화에 새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후 80년대 말까지 대봉 부도의 부담을 안고 어렵게 경영기반을 정상상태로 끌어올렸으나 94년국제산업공사, 96년 한라그룹, 태일정밀, 두성정밀의 부도로 인한 부실대출부담이 가중되면서 제2의 위기상황을 초래하게 됐다.

 96년 2월 주주총회에서는 지방은행 가운데 유일하게 12억원의 적자를 기록해 급기야 청주상공회의소 한현구 회장이 경영부진에 따른 임원 문책과 학연 · 지연으로 얽힌 대부 파벌 갈등의 해결책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나서기도 했다.

 마침내 IMF 태풍이 몰아쳤고 금융권 구조조정 대상에 올라 98년 2월 경영개선 명령을 벋았고 같은 해 7월 경영 정상화 이행계획서를 제출한 상태에서 증자를 통한 독자생존을 모색했으나 결국 조건부 시한까지 증자가 이뤄지지 않아 강제합병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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