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변혁 운동인가? 국가변란 목적인가?

강압수사로 초기 시인… 검찰조사부터 부인 일관

취재과정에서 두사람을 함께 사진촬영하는데 실패했다.
청주시민회·충북연대의 핵심적인 일꾼이다보니 서로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이들은 7년전의 ‘자주대오’ 망령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청주의 대표적인 시민단체에서 고단한 사회변혁 운동을 계속하고 있지만 혹시나 ‘레드(RED) 컴플렉스’로 인한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다.
한때 군사독재정권의 직접적인 ‘희생자'였지만 ‘정의로운 세상’을 향한 이들의 의지는 여전히 뜨거웠다.

- 군인 신분으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불이익은 없었는가.
송국장 = "18일 동안 매일 조사를 받고 1개월만에 22사단 군감방에서 가족면회를 할 수 있었다.
당시 민변 변호사가 무료변론을 맡았지만 한 번 정도 접견했을 뿐 군사재판 과정에서 보지도 못했다.
특히 장호원 군교도소는 비인간적인 수형생활로 견디기 힘들었다.

5명을 독방에 나눠 수감한 뒤 교묘하게 분리전술을 구사해 정신적인 고문까지 가했다.
군교도소가 지긋지긋해 항소를 포기하고 민간교도소로 이감된 것이다”

-자주대오 사건이 전국 언론에 보도되면서 가족들의 충격이 크지 않았나.
백실장 = “집시법 위반으로 첫 구속됐을 때는 동네 분들이 ‘대학 학생회장하면서 정치 잘하라고 데모하다가 붙잡힌 똑똑한 아들’ 이라고 위로해 주셨는데,자주대오가 이적단체·주체사상 집단으로 방송보도되자 ‘간첩은 부모자식간에도 모른다, 간첩번호가 있다더라’는 식으로 완전히 빨갱이로 낙인찍혔다.
그러니 부모님들의 마음고생이 어떠했겠는가"

-사회활동을 하면서 자주대오 사건전력 때문에 피해를 입지는 않았는가.
송국장 = “김영삼 대통령 취임직후 일부만 제외하고는 자주대오 관련자가 대부분 사면복권됐다.
하지만 나같은 경우는 주민등록표 병적란에 불명예 제대사실이 그대로 기록돼 있다.
정상적인 취업은 젖혀두고라도 작년에 시민단체의 일본방문때도 당황스러웠다.
여권신청을 했는데 다른 사람은 1주일만에 나오고 나만 늦어지는 바람에 결국 일정에 될 수없어 포기했다”

-자주대오 사건을 한마디로 규정한다면.
백실장 = “당시에는 경찰뿐만 아니라 안기부·보안사의 학원사찰도 상례화됐다.
나 자신도 윤석양이병의 양심선언을 통해 보안사 사찰대상자로 오른 것이 확인됐었다.
결국 보안사에서 현역 군인인 운동권 출신자들를 조사하는 형식을 빌어 시국사건에 직접 개입하는 선례가 된 셈이다.
5월 시위정국을 맞아 공안당국의 정치적인 판단에 따라 덜미를 씌운 것이 청주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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