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 충북의 의문사 조작의혹 7대사건 - 충북의 의문사·조작사건 3

도내 최대 공안조작사건…청대생 17명 무더기 구속
위기정국 속 보안사 수사 앞장…국면전환용 희생양

1991년 5월은 유난히 뜨거웠다.
4월 26일, 명지대 강경대 군의 치사사건으로 정국은 가파르게 요동쳤다.
강군은 시위도중 진압전경들에게 붙잡혀 집단구타당해 숨진 것으로 밝혀졌다.
강군의 죽음은 지난 87년 6·10항쟁의 도화선이 됐던 연세대 이한열군의 최류탄 사망사건에 버금가는 파괴력을 나타냈다.

각 대학에서는 연일 정권퇴진 집회가 벌어졌고 안동대·경원대·서강대에서 잇따라 분신자살 사건이 발생했다.
전국 59개 대학이 동맹휴학에 돌입했고 노동계도 단체교섭 시기와 맞물려 5·18 총파업을 결의했다.
대학 교수들까지 '반민주 악법철폐’등을 요구하는 시국선언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3당합당 이후 최대 위기에 봉착한 노태우 정권은 마침내 노재봉 총리를 전격 경질시키는 등 정국수습에 나섰다.

특히 강기훈씨의 유서대필 사건이 터지면서 재야와 대학운동권에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신임 정원식 국무총리가 한국외대 대학원 강의도중 학생들에게 계란, 밀가루 세례를 받고 끌려나온 '반인륜적’ 사건이 벌어지자 공안당국은 일제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다.
대학·노동계 지도부가 무더기 구속당했고 서강대 박홍총장은 연쇄분신 자살에 대해 ‘죽음 선동세력 있다’는 폭탄 선언을 해 재야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했다.

5월 시위정국 돌파구를 찾아라
이와같은 5월 정국의 반전 시점인 6월12일 청주에서는 청주대 재·졸업생이 관련된 ‘자주대오’사건이 발생했다.
대학재학중 군입대한 관련자를 포함해 구속기소 17명, 불구속 기소 20여명에 달하는 대규모 조직사건이었다.

'자주대오’는 NL(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계열의 ‘지하 이적단체’로 체제를 전복하고 민중정부 수립을 꾀한 반국가 단체라는 것이 수사당국의 발표내용이었다.
조직 책임자로 내몰린 사람은 청주시민회 송재봉사무국장(31·88년 청주대 총학생회 기획부장)과 충북연대 백상진정책실장(31·88년 청주대 총학생회장)이었다.

사건 당시 송국장은 졸업후 군복무 중이었고 백실장은 집시법으로 구속되면서 청주대에서 휴학중인 상태였다.
청주대 ‘자주대오’사건은 검·경이나 안기부가 아닌 국군 보안사에서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밝혀졌다.
청주대 출신 현역군인 5명에 대해 일제조사를 벌인 뒤 '자주대오’라는 밑그림을 경찰에 제시한 것이다.
대학내 운동권에 대한 수

사를 공안당국이 아닌 군에서 손을 댄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건 관련자들은 강기훈씨 유서대필 사건을 시발로 공안당국이 대반격를 시도하면서 보안사가 서둘러 '한 건 올리기’ 에 나셨던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충북도경 대공과에서는 사건개요도 모른채 초기수사를 진행했다는 것이 관련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특히 조직구성의 핵심 요건인 규약과 강령조차 보안사의 조작된 수사자료를 그대로 원용해 자백을 강요했다는 것.

보안사의 수사착수 시점은 91년 5월 15일께로 추정된다.
"강원도 고성의 22사단 신병훈련대에서 마지막 5주차 훈련을 받는 중이었다.그런데 갑자기 보안사 요원이 찾아와서 조사할게 있다며 군복 견장 등을 떼내고 워커도 벗도록 지시했다.그리고 곧장 성남의 보안사 본부까지 압송해 갔다.서울까지 끌고가는 상황에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자마자 구타가 시작됐고 거기서 꼬박 18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청주시민회 송국장의 증언이다.
송국장은 보안사 본부로 끌려갈 당시에는 ‘혹시 간첩단 사건 정도로 만들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컸지만 막상 대학내 운동권 활동에 관한 질문이 떨어지자 내심 안도했다는 것.

하지만 3명의 수사관들이 번갈아가며 구타, 잠안재우기, 협박, 회유를 통한 조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특히 청주대에서 총학을 중심으로 모였던 운동권 학생들의 서클조직명에 대해 집요한 추궁이 이어졌다.
훈영규칙은 어느새 조직의 강령·규약으로 둔갑했고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이름은 ‘이적단체’ 조직원으로 등재됐다.
한 사회의 변혁을 주장하는 순수한 학생운동 조직이 서서히 북한정권을 이롭게하는 ‘주사파 이적단체’ 로 각색됐다.

보안사 밑그림 검 · 경 덧칠
송국장의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권영환씨(당시 병장 복무 중)를 비롯한 추병국·고원준·정수범씨등 청주대 출신의 단기사병(방위병)에 대해서도 일제조사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88년 백상진 총학생회장 체제의 청주대 NL계 운동권 학생의 이름이 30여명 불거져 나왔다.
보안사는 6월초 문제의 명단을 치안본부로 넘겼고 충북도경 공안과에서 바톤을 이어받게된 것으로 추정된다.

충북연대 백실장이 모충동 자취방에서 새벽 4시께 연행된 시점이 바로 6월초 였다.
“혼자 자고있는데 느닷없이 들이닥쳤다.청주경잘서로 연행됐는데 첫날 저녁무렵에 서울 치안본부대공분실에서 내려온 수사관들이 합세해 조사를 벌였다.보안사의 사건개요로 보이는 자료를 꺼내놓고 질문을 하는데 수사관들이 학우들 이름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갈팡지팡하는 모습이었다.

자주대오란 조직명도 수사관 입을 통해 처음나왔고 강령·규약도 미리 정리한 걸 읽으면서 시인하라는 식이었다.잠안재우기는 기본이고 갖가지 협박·회유가 뒤따랐다"
경찰은 백실장에게 ‘반국가단체 구성’ 운운하며 '최하 무기징역감'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너 하나쯤 죽여도 쥐도 새도 모른다"는 협박에는 외부에서 자신의 연행사실조차 모른다는 가정하에 실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처음에는 완강히 부인했다.하지만 수사과정에서 힘겨운 한계상황에 처하다 보니까,어차피 구속시킬텐데 법정에서 진실을 가리자고 판단했다.그래서 경찰수사에서는 강령·규약·조직에 대해 시인하는 진술을 했고 검찰수사부터 사실대로 부인했다.

내 경우는 이미 집시법으로 구속수감된 경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주대오 수사당시 엄청난 심리적 압박을 느꼈다.그러니 처음 연행된 다른 후배들은 어떠했겠는가? 결국 강합 수사에 처음부터 맞서지못한 자책감 때문에 모두가 괴로웠다" 백실장은 공안당국의 '각본'에 따라 끌려갈 수밖에 없었던 당시 상황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이념서클이 반국가이적단체로
보안사와 경찰은 사건 공소장을 통해 '자주대오는 북한공산집단의 정부를 참칭하고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불법조직된 반 국가단체’ 라고 규정하고 NL계 조직원들이 수시로 북의 주체사상을 교육받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CT(중앙위원·Control Tower)를 구성해 혁명투쟁조직인 자주대오를 결성,‘주체사상을 수용해 미제국주의와 군사독재정권을 타도하고 민중민주정부 수립과 고려연방제 통일을 실현’하고자 했다고 덧붙였다.
“공안당국의 공소사실은 관련 학우들로부터 압수한 이념 서적의 내용을 옮겨적은 것에 불과했다.과연 이적단체라면 북한정권를 이롭게한 구체적 사실이 제시되야 하는데 그저 주사파 이념학습을 했다는 것 뿐이다.당시 청주대운동권이 NL노선(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에 따라 총학생회를 구성되고 일정한 학습서클이 운영되 온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전국 어느 대학에서나 볼 수 있는 사회학습 모임에 불과한 것이고 주체사상은 개인적 차원이라면 몰라도 모임에서 공론화한 적은 없었다.학습임에 강령·규약이 있을 리 만무고 그런 모임을 ‘지하조직’, ‘이적단체’ 로 몰아부친 것은 전형적인 짜맞추기 수사”라고 백실장과 송국장은 단정했다.

결국 백실장과 송국장은 국가보안법위반(이적단체 구성)혐의로 각각 1년6개월의 실형 선고를 받았다.
‘이적단체 주모자'의 형랑치고는 너무도 가벼운(?) 선고였다.
또한 2년 뒤 문민정부의 출범에 따른 양심수 사면복권에 따라 자주대오 관련자들도 대부분 사면복권됐다.

하지만 사건발생 7년이 지난 현재까지 관련자들은 제대로 모임 한번 갖지 못했다.
사회생활로 복귀하며 서로를 챙길 여유가 없었고 순수했던 젊은 날의 ‘상흔’이 그만큼 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반국가 단체를 결성’한 사람들이 사건 이후 단 한 차례도 모임을 갖지 않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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