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윤하영지사 '독직사건'으로 구속
'빨치산습격' 2대 이광지사 '도중하차'

1945년 해방과 함께 충북도에도 ‘따뜻한 봄’이 찾아 왔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도 잠시 좌·우익의 반목과 갈등, 연이은 6·25전쟁등으로 인해 도정과 민생은 피폐해졌다.
또 이승만정부하의 가혹과 폭정, 이후 찾아온 5·16 군사쿠데타등으로 경제발전이라는 미명아래 인권유린과 군사정부의 혹독한 고문정치는 시작됐다.
희생을 강요당한 채 18년여라는 시간을 숨도 제대로 쉬지못했던 국민은 비로소 ‘서울의 봄’으로 시작된 민주주의를 피워보지도 못한 채 또다시 암울한 군사정권시대의 도래를 지켜봐야만했다.

시간은 흘러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책임과 12·12군사반란 등의 죄목으로 전·노 두 전직대통령은 사법처리되는 비운을 맞았고 ‘문민정부’에 이어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다.
이렇듯 건국 50년 역사와 함께 도정도 숱한 역경과 아픔을 간직한 채 지금 이렇게 서있다.
충청리뷰는 창사 5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건국 50년 속의 충북도정’이라는 특집기획물을 준비, 시리즈로 게재할 예정이다.

역대도지사 행적과 사회·경제상황 등을 중심으로 시대구분은 편의상 제1기 (1945~1954년), 제2기 (1955~1959년), 제3기(1960~1963년), 제4기 (1964~1974년), 제5기(1975~1980년), 제6기 (1981~1987년), 제7기(1988~1991년), 제8기 (1992~1997년)로 나눴다.
(편집자)

제 1기 (1945~1954년)
해방과 함께 전국적인 혼란과 동요로 민생은 극도로 피폐한 상황이었다.
좌·우익의 극심한 반목과 대립으로 미 군정청의 신탁통치는 국민의 형편은 고려하지 않은채 우익의 손을 들어주는 상황이었다.

일제 강점기간동안 일본을 위해 부역했던 사람들을 처벌하기위해 조직됐던 '반민족처벌 특별조사위원회'는 미군의 편의대로 와해돼 사면됐고 오히려 군·검·경·행정조직등에 그대로 중용되었다.
우여곡절끝에 비로소 1948년에서야 정부가 수립됐다.
지방행정기관직제가 제정공포돼 충북도의 기구도 비로소 태동되게 된다.

독실한 종교인 윤하영지사
초대 도지사는 평북의주 출신의 윤하영씨(46.2.15~49.1.28)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수학한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미군정청 여론조사 과장과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도지사 밑에는 비서실, 내무국, 경찰국, 학무국, 사회국 및 산업국 등 1실 5국이 구성됐다.
또 도청에는 미 군정청도 함께 들어섰는데 도 군정장관에 머피중령, 부군정장관에는 더피중령이 부임했다.
당시 도 공무원정원은 총 271명, 시·군까지 합치면 2200여명으로 지금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충북관구 경찰청 설립
해방당시 청주읍이 군정하에서 청주부로 승격(46.6.1)되고 49년 7월 4일 청주시로 개칭돼 지금에 이른다.
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사항으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가 발표되어 나라 전체가 시끄러워졌으니 치안문제가 더욱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더구나 이틀후인 12월 30일에는 우익진영의 정치지도자 송진우 선생의 암살사건이 일어나 찬·반탁의 소용돌이와 함께 온 세상이 벌집을 쑤셔 놓은 듯 소란해졌다.
해가 바뀌어 46년 2월 중앙의 미군정청에 경무부가 신설되어 조병옥박사가 초대 경무부장에 앉고 봉사와 질서를 표방하는 국립경찰이 창설됨으로써 충북관구 경찰청이 설립되어 박재수 초대청장이 4월 1일 부임했다.

재임 3년동안 청빈한 도백으로 칭송을 받던 윤하영지사에게 49년 1월 큰 시련이 닥쳐왔다.

'6·25'로 부산중앙호텔에 '임시도청'
이명구지사 피해복구등 전시행정주력
신간회출신 정현모씨 '정치지사'부임

당시 국민일보가 독직의혹사건을 대서특필하면서 그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졌다.
판공비 용도,미군 원조물자 처분내역등 연일 속보로 도정기사가 실리자 윤지사는 구속되고 결국 유죄판결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49년 1월 윤지사는 해임되고 2대 지사로 이광씨 (49.1. 28~51. 7.26) 가 부임하게 됐다.

빨치산 승격에 ‘화’ 모면
이광지사는 중국 북경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상해 임시정부 화북구 선무단장과 중국 중앙은행 국고국 비서를 거쳐 안창호선생이 주도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구국활동에 투신,1912년 남만주의 교민 자치기관인 부민단을 조직해 신흥무관학교로 발전시켜 독립군 양성에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이지사 재직기간에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은 아무래도 6·25다.
50년 7월로 접어들자 청주의 사회 정황도 시시각각으로 긴박을 더해 갔다.
7월 4일 이광지사는 청주지역 주민들에게 피난갈 것을 선포했다.

충북도청도 옥천군청에서 대구로 이동했다 부산으로 옮기는 등 피난살이를 했다.
당시 부산역 부근의 중앙호텔이 9·28수복때까지 2개월 남짓 임시도청 구실을 했다.
51년 5월말경 청주시내 주요기관이 빨치산의 습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대사건이 발생했다.

청원군 낭성면 산악지대로부터 상당산성 우암산에 이르는 경로를 타고 잠입한 빨치산이 청주형무소와 도지사관사를 습격했으나 다행히도 이광지사는 북쪽 울타리를 넘어 수동 민가로 피신,화를 면했다.
이에 6월 3일 부산 임시수도의 피난국회에서 청주피습사건에 대한 신랄한 책임 추궁끝에 이광지사와 정태섭 경찰국장은 7월 26일 인책해임된다.
이광 지사의 뒤를 이어 오창출신의 이명구씨(51.7.27~52.9.17)가 제3대 충북지사로 발탁된다.

양곡횡령사건으로 퇴진
청원군 오창면 백현리의 가난한 농가 출신의 이지사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군사원호회 충북지부 부지부장 국민회 충청북도본부 위원장 등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일제시대로부터 수십년만에 처음 맞이하는 충북출신의 도백이어서 범도민적인 환영분위기가 드높았다.

한편 해방후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서 이명구씨는 친일혐의로 면밀한 조사를 받은일이 있는데 불기소처분이 결정됨으로써 친일혐의에 대해 면죄부를 받은 일도 있다.
이지사는 징병,노무동원,피난민 구호,피해복구,민심수습등 주로 전시지방행정에 주력했는데 1년 2개월이라는 단명지사로 끝이 난 이유는 1952년 6월초 충주에서 전국 최대규모의 정부양곡 횡령사건이 발생했던 것이 이지사의 퇴진을 불가피하게 만든 요인이 아닌가하는 일부 견해도 있다.

‘정치지사' 정현모씨
1952년 9월 제4대 도지사로 정현모씨(52.9.18~53. 11.23)가 부임한다.
57세의 깔끔함이 돋보이던 경북안동 출신의 선비였다.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를 마치고 이상재선생의 신간회에서 활동을 하기도했다.

또 1929년 조선일보 주필이되어 날카로운 필봉을 날리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1대에서 4대까지 지사들은 홀륭한 학벌,중후한 경륜,빼어난 인품과 덕망등 건국 초창기와 한국동란 중의 비상시국을 의연하게 타개했던 거물 도백으로서 그분들의 명성이 오늘까지도 도민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충북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