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 친손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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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친손은 누구인가?
  • 권혁상 기자
  • 승인 1998.04.18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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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아들 수범씨 작고후 또다른 호적 출현 친생자 주장

 혈통시비 비화…법정소송 8년째
 검찰 유전자 감식…진실 드러날 듯

 단재 신채호 선생의 친손자 (槻孫子) 여부를 놓고 지난 8년간 벌여온 법정공방이 검찰의 유전자 감식작업에 따라 조만간 진실규명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단재 선생의 외아들인 신수범씨(사망당시 72 세)가 지난 91년 숨지기 직전까지 함께 살던 가족들과 신씨 사망직후 뒤늦게 나타난 신희철씨(51세)사이에 벌어진 이번 법정분쟁은 단재 선생의 혈통 시비로 비화되면서 고령 신씨 가문의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청주의 자랑스런 역사인물인 단재 선생의 혈통에 대한 진위문제는 지역민들에게도 소홀하게 취급할 수 없는 '핫이슈' 라고 할 수 있다. ‘충청리뷰’ 는 지난 8년간의 지루한 법적분쟁을 되짚어봤다. 아직 까지 수사기관의 종결처분이 내려지진 않았지만 핵심사항 이었던 친손여부는 사실상 실체가 밝혀졌다. 단재 선생의 핏줄시비에 얽힌 그간의 경위와 실체를 새롭게 조명한다.

 단재의 결혼과 핏줄
 단재 신채호선생은 1880년 대전에서 태어나 8살때부터 청원군 낭성면에서 성장했다.
셩균관에서 교육을 받고 독립 협회에 가담해 개화자강의 계몽사상을 고취시켰다.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등에서 날카로운 필봉으로 반일을 주장하고 김구, 안창호지사등과 신민회를 조직해 비밀결사활동도 벌였다. 1910년 안창호등과 러시아 브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한 뒤 중국 상해로 건너와 임시정부에서 활약했다.

당시 임정대표였던 이승만의 신탁 통치 노선에 반대하며 자주독립을 주장하다 1920년 박자혜 여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박여사는 1919년 3 · 1만 세운동 당시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던중 시위를 주도해 일경에 쫓겨 망명한 처녀였다.

 당시 단재 선생은 한국에서 첫 부인인 풍양 조씨와 이혼하고 독신생활을 하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15살의 연령차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행복한 새 출발을 하게 됐다. 두 사람 사이에는 모두 2남1녀의 자식을 있었으나 일찍 숨을 거두고 아들 수범씨만이 유일한 직계 혈족으로 남게 된다.

 외아들 수범씨 월남
 독립운동가 부모를 둔 신수범씨 역시 단란하고 오붓한 가정생활을 맛보진 못했다. 더구나 15세 때는 1936년, 단재 선생은 조국해방도 보지못한 채 중국 여순감옥에서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얼굴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신씨는 중국을 떠돌다 해방후 2년만에 고국땅을 밟게 된다.

평앙에 정착한 신씨는 권모씨와 결혼한후 1남 3녀의 자식을 두었으나 북한정권에 대한 정치적 거부감으로 노동당 입당을 하지 않았 다는 것. 결국 1950년 한국전쟁 발발직후 집으로 찾아온 당간부와 언쟁이 벌어졌고 칼을 들고 다투다 간부가 숨지자 일단 몸을 피하기 위해 월남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처와 자식을 남겨두고 서둘러 남행길을 나선 신씨는 한때 거제도 피난민수용소에서 생활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당시 자유당 정권의 문부상을 지냈던 신백우씨등 생전의 단재 선생과 교분이 있던 인사들 덕분으로 서울에 정착하게 된 신씨는 60년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모임인 순국선열회를 조직 하는 등 지난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62년 단재 선생이 건국훈장 대통령 장, 박자혜여사가 애족장의 서훈을 받으면서 신씨는 정부의 도훔을 벋아 제일은행 직원으로 특채된다.

40대의 ‘월남 홀아비’로 알려진 신씨가 새 장가를 들게 된 경위는 극적이다. 신씨가 제일은행에서 일하던 65년, 당시 서울시청 농구부 선구였던 부인 이덕남여사(54 · 서울 강남구 개포동)가 은행일을 보기위해 찾아왔다가 갑자기 복통을 일으키며 쓰러진 것.

 이 때 신씨가 나서서 자신이 아는 한의원으로 후송했고 담석증을 앓고있던 이여사는 병이 완쾌되면서 신씨에게 적극적으로 구혼하는 입장으로 변했다는 것. 마침내 두사람은 66년 일가친척도 없이 고향 지인의 예식장을 거져 빌려 ‘심야 결혼식’ 을 올리게 된다.

 “이북에서 혼자 내려온 홀아비 살림살이가 어떻겠어요, 결혼해보니 짝 맞는 맞는 양말이 하나도 없을 정도 였어요. 그래도 그 분의 남자 다운 정의감과 삶에 대한 의욕이 좋아보여서 앞뒤 안가리고 결혼할 작정을 했어요.

 맨몸으로 서로 만나 살면서 여러가지 힘들고 서글픈 기억도 많았지만 그래도 딸, 아들 낳고 후회 없이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그 양반이 돌아가시자마자 이런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진 거예요” 이 여사의 아련한 신혼추억담은 결국 격앙된 목소리로 변하고 만다.
 
 또한명의 단재 친손?
 지난 91년 5월 당시 72세의 나이로 신수범씨가 숨지자 2개월 뒤인 7월께, 자신이 큰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신희철 씨(51 · 사업)가 나타났다.

이 여사가 보훈처에 호주승계에 따른 연금수혜자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신희철씨의 존재가 확인된 것. 당시 보훈처에는 단재 선생과 부인인 박자에 여사의 독립유공자 가족 기록카드가  각각 별도로 관리되고 있었다.

문제는 단재 선생의 카드에 아들 수범씨와 함께 손자로 희철씨의 이름이 올랐던 것. 박자혜 여사 카드에는 신수범씨와 이덕남 여사 사이에 출생한 딸 지원씨(28), 아들 상원씨(27)만이 나란히 기재 됐다. 수범씨의 생존 당시에는 유일한 연금수혜자였기 때문에 그대로 통장으로 지급됐었다.

 하지만 수범씨가 사망하자 보훈처는 호주승계자에게 연금을 지급해야할 형편인데 신호철 · 신상원씨가 단재와 박자혜여사의 친손자로 각자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당시 호철씨가 제시한 근거는 신수범 씨가 지난 59년 정부의 가호적법 발효에 따라 취적한 가호 적이었다.

 가호적에는 61년 신씨와 조진순씨(82년 사망)가 혼인신고를 했고 당시 14세 였던 조씨의 아들 호철씨가 아들로 올라 있었던 것. 깜짝 놀란 이여사는 법원에 호철씨에 대한 ‘친생자과계 부존재 확인소송’ 을 제기했다. 아울러 호철씨의 존재를 알아보기 위해 수소문에 나섰고 지난 54년 안성국민학교의 학적부에서 황경주’ 라는 이름을 찾아낸다.

즉 안성이 고향인 조씨가 재가를 하면서 아들인 황경주’를 오빠의 호적에 올렸다가 다시 수범씨의 호적에 '신호철' 이란 이름의 친생자로 등재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생전의 신수범씨와 호철씨의 생모 조진순씨 간에 사실혼 관계가 존재하는가 여부이다. 이에대해 항소심 재판부에서는 '신수범이 생모인 조진순과 합의하여 신호철을 친생자로 출생신고한 것으로 형식이나 절차에 다소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입양으로서의 효력이 있다’ 며 돈생자 관계는 존재하지 않으나 양친자 관계는 셩립되었다’ 고 판결했다.

친자가 아닌 양자로 판단한 내 내용이었지만 두사람의 사실혼 관계를 인정해 ‘법률상 친자관계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는 호적기재 말소등은 바람직하지 않다’ 는 의견을 달아 소 자체 를 각하시켰다.

친자가 아닌 양자?
이에대해 이덕남여사는 "애들 아빠가 지난 60년 서울을 지로에 사무실를 내고 순국선열유족회 결성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함께 준비작업을 했던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조씨는 당시 근처 식당에서 일하 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서로간에 면식이 있는 정도였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 그때 두사람의 결합이 이루어졌다해도 47년생인 신희철과는 도저히 나이관계가 맞지 않는 억지 주장”이라고 설명한다.

한편 친생자로 주장하는 신희철씨는 “두분의 만남은 아버님이 월남한 직후부터 였고 군 정법에 따라 가호적법이 발효 되자 어머니와 나를 뒤늦게 호적에 등재한 것이다. 하지만 이덕남씨와 관계가 드러나면 서 어머니와 불화가 심해졌고 결국 우리 가족과 연락두절된 상태로 지냈다.

아버님이 생전에 할아버님의 친손자로 나를 독립유공자 가족카드에 올린 것이고 배다른 형제인 상원이를 '학교입학할 때가 됐다’ 며 호적에 올리겠다고 하시길래, 내가 반대하자 뒤늦게 86년도에 그쪽 식구들만의 호적을 새로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수범씨는 이덕남여사와 1남1녀의 호적을 뒤늦게 지난 86년도에 법원으로부터 취적허가 받았다. 하지만 출생 연도를 1921년 1월 15로 기재해 희철씨가 제시한 가호적 상의 1919년 1월 15일과 2년의 시점차가 드러났다. 이에 대해 이여사측은 “일제당시 서대문 경찰서 정보사찰 문헌에 보면 1919년 시어머니 박자혜여사가 중국으로 망명한 것으로 써있다.

그밖에 중국내의 한국독립 운동사료를 보면 1920년 단재 선생님이 결혼 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런데 어떻게 1919년에 애아빠의 출생이 가능하단 말인가?"며 희철씨의 가호적에 대한 취약점을 지적하고 나섰다.
한편 법원에서 양자관계만을 인정받은 희철씨는 지난 97년 7월 서울가정법원에 2개로 나눠진 신수범씨 가족호적를 자신을 호주승계권자로 해서 하나로 바꾸는 호적정정 소송을 제기했으나 각하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여사측에서 희철씨가 소송 자료로 제출한 일부 공문서가 위조변조됐다며 연금 수혜권을 차지하기 위한 사기혐의로 검찰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결국 민사사건이 형사 사건으로 비화된 것이다. 마침내 서울지검에서는 유전자감식법을 통해 친생자 유무를 가리기로 하고 지난 2월 청원 가덕면에 위치한 신수범씨의 묘에서 대퇴부 뼈를 일부 수습했다.

 또한 이덕남여사와 두 자녀의 머리카락을 채취해 1차 조사를 벌인 결과 친생자 관계인 것으로 확힌됐다. 2차적으로 검찰은 유전자 감식에 반대하던 희철씨에 대해 전격적으로 머리카락을 채취해 검사한 결과 친생자 관계가 드러나지 않았다.

파묘후 유전자 감식
결국 최신 과학기술에 의해 8년간의 친생자 시비가 막을 내리는 시점이다. 하지만 희철씨는 유전자 감식결과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고인에 대한 도리가 아니기 때문에 반대했고 묘지관리인 인 나의 동의도 없이 파묘한 것은 인정할 수 없다. 유전자 감식법의 맹점에 대해서도 국내에서 여러차례 지적된 바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이덕남여사 가족흔 오랜 법정소송을 통한 상당한 정신적 · 물질적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심지어 지난해 결혼식을 치른 딸은 친정이 혈통시비에 휘말리자 시가에서 예기치않은 오해를 하는 바람에 엄 청난 정신적 고통을 겪은 것으로 전해졌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연금수혜마저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져 경제적인 어려움도 만만치 않았다는 것.

 이 여사는 “이제 친생자 여부에 대한 확실한 판정이 나면 앞으로 고인들의 명예와 후손의 신분보호를 위해 잘못된 호적을 제대로 바로잡는 일에 나설 작정이다가 당초 보훈처에서 이중으로 유족카드를 관리하는 바람에 뒤늦게 가족들이 고초를 겪게 된 것이다. 그동안 심려를 끼쳐드려 문중 어른들께 송구스러울 따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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