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과 함께한 평민의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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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과 함께한 평민의병장"
  • 권혁상 기자
  • 승인 1998.03.07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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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수 동상추진위】'한봉수의 항일투쟁' 일대기 발간

충청 강원 경기지역서 활동 … '번개대장' 별명
6.25당시 내수보도연맹 학살위기 주민 구해

구한말 충북 일원에서 의병 활동를 벌였던 한봉수 의병장의 항일투쟁을 담은 연구서적이 발간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봉수의 병장동상건립추진위원회는 지난 25일 한봉수의 항일투쟁’ 이란 제목의 일대기를 발간해 각급 학교와 단체 등에 배포했다.

특히 책의 저자인 박걸순박사(독립기념관 한국립운동사 연구소 책임연구원)도 같은 청원출신의 독립운동 사학자로 알려져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책에는 한봉수의병장의 항일 투쟁 내용과 재판기록등 풍부 한 자료를 담고있으며 충청지방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요약했다.

“원래 진위대 상등병으로 한봉수라는 자가 있다. 부하 20~30명을 거느리고 상당히 기략이 뛰어나 우리 30년식 步騎兵銃 및 탄약 약간을 가지고 일찍이 청주군 세교리에서 우편물을 빼앗아 1만여원을 얻어 이를 지방민에게 산포하여 신용를 널이 얻은 후 이후 우편물 악탈, 자산가의 겁략을 주로 하고 교모하게 토벌망을 피하여 겨우 살아 가면서 연말 (1909)부터는 경상북도 북부 지방에 침입하였다”

일제 당시 일본군이 쓴 ‘조선폭도벌지'에 실린 내용이다.
'조선폭도'는 다름아닌 구한말 무력으로 일제에 맞선 의병을 뜻한다. 한봉수의병장은 지난 84년 청원군 북이면 세교리에서 태어났다. 구한국군 진위대에 복무하다 1907년 군대가 강제해산되자 의병장 김규한 진영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해산군인 100여명을 규합해 '왜적驅逐隊'라는 의병조직을 결성했다.

한의병장은 진천 문배리에서 일군 헌병 중위 시마자끼등 3명을 사살하고 그 무기를 노획하는등 위세를 떨치면서 주 로 충청,강원,경기의 3도 경계지역에서 민첩한 활동을 벌여 일명 '번개대장'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08년 1월 괴산 청천면에서 일군을 습격을 받았으나 한봉수 의병대는 일군 12명을 사살하고 장총 12정, 권총 2정, 탄환 1상 자와 군수물자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식량과 무기의 공급이 원할치 못하고 일군의 토벌 작전이 강화되면서 부득이 의병대를 해산하고 처가인 서울 마포로 피신했으나 일헌병에 체포되고 말았다.1910년 공주재판소 청주지부에서 내란 죄로 교수형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2개월뒤 일제의 한일합방에 다른 대사면령으로 석방 된 뒤 고향으로 내려와 철저한 감시와 탄압속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고향선배인 손병희선생등을 만나 3 ·1 만세운동의 계획을 듣고 미원등 인근지역의 만세운동에 영향을 끼쳤고 결국 보안법 위반으로 또다시 1년 징역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가난한 평민출신 의 한의병장은 민중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남달랐다. 6 25 발발 당시 일화 가운데 이러한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전쟁초 후퇴하던 국군은 서울 이남지역에서 좌익전력이 있는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총살극을 벌였다.

한의병장의 고향 인근에서도 보도연맹원를 내수초등학교에 모아놓고 처형을 준비중 이었다. 하지만 소식을 전해들은 한의병장은 학교로 달려가 지휘관인 연대장에게 “여기에 가둔 농민들은 사상이 무엇인 지도 모르는 무고한 사람들이니 어서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긴장된 전시상황에서 연대장은 버럭 화를 냈지만 지서주임으로부터 한봉수 의병장이라는 소개를 받자 태도가 변했다. 자신을 보은출신의 김천일 의병장 손자라고 소개한뒤 한 의병장의 무용담을 잘알고 있다고 절을 올렸다

결국 한의병장의 설득으로 이곳에 집결된 보도연맹원들은 천금같은 목슴을 건질 수 있었다.
평생을 청빈한 생활로 일관 해온 한의병장은 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고 72년 12월 89세를 일기로 운명했다.
한편 청주시민회 · 광복회충북지부등이 나서 지난 96년 한봉수의병장동상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듬해 5월 청주 상당공원에서 역사적인 제막식을 가졌다.

한의병장의 외동딸인 한정애여사(72)는 "아버님이 나라를 위해 하신 일을 자세히 알 수 있는 책이 나오니 너무나도 기쁘다. 작년에는 동상도 만들었고 책까지 나오니 고인께서도 기삐하실 것이다. 다만 집안사정 때문에 세교리 생가를 헐어버린 것이 죄스러운 심정이다. 그동안 주위에서 도와주신 분들께 고마을 따름”이라고 감회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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