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없는 후원자들 DJ 옥바라지 은밀히 도와

80년 9월 11일 서울 용산의 육군본부 군법회의 대범정에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법정을 지키고 있던 헌병들은 분노와 울분에 가득찬 애국가를 막기위해 여기저기서 방청객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법정 피고석에는 내란음모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김대중피고인이 앉아있었다. 기도를 하는듯 눈을 감고 있는 김피고인에게 군검찰관이 사형을 구형하는 순간 방청객들은 모두 일어나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계엄하의 군사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돼 마침내 11월 3일 고등군법회의 항소심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당시 김당선자는 최후진술에서 “마지막으로 여기 앉아 계신 피고들에게 부탁드린다. 내가 죽더라도 다시는 이러한 정치보복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유언으로 남기고 싶다’’고 당부했다.

김대중후보가 15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첫 약속이 ‘정치 보복 금지’ 였다. 결국 마지막 유언이 새로운 약속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이듬해 1월 23일 김당선자는 대법원 상고가 기각됐으나 당시 전두환대통령의 지시로 임시국무회의가 열려 무기로 감형됐다. 총칼로 집권한 군사정권도 국제적인 거센 압력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이날부터 청주 외곽의 미평 청주교도소에는 비상사태가 벌어졌다.

교도소 설립이래 가장 큰 ‘손님’을 맞기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 지난 79년 건립퇸 청주교도소는 당초 정치 · 사상범 수용을 목적으로 감호소(현재 청주여자교도소)를 별도로 지었다. 하지만 김당선자의 특별감방은 청주교도소안에 마련됐다.

병사옆에 위치한 8평 남짓한 창고를 급조해 세 개의 방을 만들고 가운데 방을 김당선자의 독방으로 사용했다. 또한 특별감“방 주위에는 새롭게 벽돌담을 만들어 교도소안의 ‘작은 교도소’ 를 만들었다. 한편은 일반 재소자와 격리시키기 위한 보호조치였지만 철저한 고립감은 수감자에게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지우는 것이었다.

마침내 1월 31일 김대중 당선자는 군교도소를 떠나 청주교도소로 이감됐다. 기결수로 머리를 짧게 깍고 수인번호 9번으로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0.96평 규모의 독방안에는 간신히 화장실의 구분은 지어졌지만 마루바닥에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특이한 점은 국민회의 이용희 전의원이 교도소측에 특별히 당부해 화장실 구조를 좌변기로 바꾼 것이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이후 고관절의 통증때문에 재래식 변기를 사용하기에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다.

청주, 대전 오가는 면회길
김당선자의 부인 이희호여사의 청주 면회길은 2월 2일부터 시작됐다. 이여사 역시 연금상태였기 때문에 청주에서도 항상 경찰과 정보원이 뒤따랐다. 이여사는 회고록에서 청주교도소에 대한 첫인상을 이렇게 썼다.

“청주교도소는 신축한 지 몇 년이 안되는 곳으로 감호소를 겸하고 있었는데 대기실이 넓어서 더욱 냉기가 돌고 텅빈 느낌이었다. 역시 면회는 허락되지 않았다. 할 수없이 책, 담요, 구매물, 영치금등을 영치시키고 그냥 돌아왔다. 다시 그 길로 대전교도소로 홍일이를 찾았다. 대전교도소는 건물이 무척 낡아 있었다. 홍일이는 아버지가 사형을 면하게 된 것을 알기 때문에 서울구치소 에서 보다 훨씬 밝은 표정이었다."
이여사는 장남 홍일씨(현 국민회의 의원)마저 구속수감된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청주, 대전 두 곳에서 옥바라지를 해야했다. 청주교도소의 면회는 1개월에 1회만 허용됐다. 하지만 이여사는 자신이 다녀갔다는 위안을 주기위해 일주일에 한번은 청주로 내려와 영치물을 넣거나 쪽지편지를 남기고 갔다. 김당선자에 대한 엄격한 면회제한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가족들을 위해 면회를 포기한 상황이었다. 당시 청주에서 이여사의 옥바라지를 가장 열성으로 도운 이한준옹(76)의 증언이다.

“그때 당시 김대중선생을 걱정하는 사쾀들은 면회라도 한번 해봤으면 하는 생각들을 다 가졌지만, 그러면 가족들의 기회를 빼앗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포기했다. 그래서 나같은 경우는 옥중생활에 필요한 음식, 비품을 구하고 청주에 내려온 이여사를 안내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하지만 실제 고생은 이여사가 혼자 다 한 셈이다”

이옹은 김당선자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여사로부터 전해듣고 사전준비를 하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한번은 ‘교도소 김치가 너무 짜기때문에 먹기가 곤란하다’ 는 말을 전해듣고 김치통조림을 찾기 위해 청주시내를 샅샅이 뒤지기도 했다.
또한 오산 미군 공군부대에까지 가서 날생선 통조림을 구하기도 했다. 이밖에 이옹의 맡았던 일 가운데는 오전에 면회가 끝난 이여사에게 점심식사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후원그룹 남몰래 이여사 도와
이옹은 당시 본정통(현재 성안길)의 흙다방에서 이여사를 만나 예약된 음식점으로 향했다. “그때만 해도 이여사의 얼굴이 크게 알려지지 않아 주변에서 알아보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어요. 하지만 단둘이 만나면 어색할 것 갈아서 우리집사람까지 함께 움직였죠. 너무 시끄러우면 곤란하니까, 양식 집, 한식집에서 주로 식사를 했어요. 식사비는 야당생활하는 내 형편이 뻔하기 때문에 김대중 선생을 지지하는 몇몇 후원자들이 나중에 은밀하게 계산하는는 식이었지요” 이옹의 뜻에 따라 후원에 나선 사람들은 대략 9명으로 체육인인 오헌식씨(전 충북레스링협회장)와 금은방을 경영하는 김정일씨(현 정확당 대표)등이 적극적으로 도움을 줬다는 것.

면회 월 1회 · 운동 1일 30분 허용 … 하루 10시간 이상 독서
이용희 전 의원 간청으로 좌변기 설치 …꽃가꾸기 취미 익혀

특히 오씨의 경우, 이여사에게 앙장 한벌을 선사했던 일화가 지역 야당인들 사이에 회자되곤 했다. 이옹은 면회를 끝낸 이여사가 제대로 겨울옷을 갖춰입지 못해 추위에 떠는 모습이 안타까워 오씨와 상의를 했는데. 포목점을 하던 오씨가 유쾌하게 동의했고 다시 이옹이 이여사를 설득한 끝에 코트와 투피스 한벌을 맞춰 선사했다는 것.

79년 10대 총선에서 민주통일당 후보로 출마해 신민당 이민우후보와 함께 당선됐던 김현수 전의원(현 청주시장)도 당시 은밀하게 이희호 여사를 만났던 지역인사였다. 당선 이듬해인 80년 5공 정권의 정치규제에 묶여 지내던 김현수 전의원은 청주에 내려 온 이희로여사와 2~3회 만났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 전의원은 얼굴이 알려진 터였기 때문에 이여사가 저만큼 앞서 걸어가면 김 전의원이 모르는척 뒤를 쫓다가 식당에서 함께 식사를 나누었다는 후문이다.

이여사, 교도소 처우개선 요구
김당선자의 수감생활은 지극히 단조로왔다. 다른 재소자와 철저하게 분리된 채 낮에는 3명의 직원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고 밤에는 2명이 계호근무를 섰다. 하루 일과는 독서로 시작해 독서로 끝났다. 하루 10시간 이상 독서하는 날도 많았고 짬짬이 운동시간에 화단의 꽃을 가꾸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때로 나는 화단의 꽃들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훗날 역시 독서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식물에게도 말을 걸고 다정하게 대해주면 더 오래 시들지않고 자태 또한 예뻐진다고 한다. 실제로 내가 가꾼 꽃들이 그랬다. 늦가을이 돼서도 다른 화단의 꽃보다 적어도 한달 이상은 더 오래 피어 있곤 했었다’’며 청주교도소 생활의 일부를 소개하기도 했다. 외부인이라면 오로지 면회를 통해 이여사와 가족을 만나는 일 뿐이었다.

그나마 한달에 한번 뿐인 면회는 면회실 구조가 개방식이 아닌 유리 칸막이식이라서 서로 인터폰을 들고 5분남짓 대화를 나누면 끝이 었다. 서로 손한번 잡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불편함 때문에 이여사는 수감 1년 뒤인 82년 1월 23일, 법무부장관과 청주교도소장 앞으로 처우개선 건의서를 보냈다.

주요 건의내용은 완전격리된 곳에다 독실수용하지 말것, 면회를 월 2회 이상으로 하고 때에따라 특별접견을 허가할 것. 서신발송을 월 2회 이상 허용할 것. 운동시간을 30분에서 1시간으로 연장할 것. 건강진단을 행할 것 등으로 기본적인 요구사항이었다. 이에따라 일부나마 면회조건이 개선 되기도 했다. 면회가 월 2회로 늘어났고 유리칸막이에 작은 구멍을 뚫어 인터폰 대신 직접 대화가 가능하게 됐다.

하지만 면회보다 편지를 통해 나눈 김당선자 부부의 사랑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우선 이여사가 23개월 동안 청주교도소로 보낸 편지가 무려 640통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이여사 회고담 내용대로 ‘눈이오나 비가 대리나 매일 우체통에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를 집어 넣은 셈’ 이다.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의 첫마디는 늘 ‘존경하는 당신에게”였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김당선자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글의 인사말이 항상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내에게’ 였다는 사실이다.
부부가의 신뢰와 믿음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짐작할 만하다.

‘치료 명분’ 망명길에 오르다
82년 12월 14일 당시 노신영 안기부장이 이여사에게 차를 보내 자신의 관저에서 만나자는 제의를 했다. 노부장은 김당선자에게 2~3년간 미국으로 가서 병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권유해 달라고 요청했다. 만약 동의하면 가족들과 함께 곧바로 떠날 수 있도록 대통령에게 건의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미국와 국제인권단체의 요청에 따라 정권 수뇌부에게 이미 결정한 사항이었다. 사실상 김당선자는 지난 71년 불의의 교통사고름 당한 뒤 후유증으로 고관절 수술이 필요하다는 서울대 병원의 진단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김당선자는 망명제의를 완강히 반대했다. 억울하게 구속된 인사들을 남겨둔채 혼자 떠날 수 없고 가족과 함께 수술을 받아가며 지낼 경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측의 조건이 김당선자가 미국으로 떠나야만 나머지 구속인사들 문제도 전향적으로 풀어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미국에서의 생활비는 서예전등을 통해 후원금을 모금하는 방식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 결국‘더러운 타협이 아니라면 살아남는 길은 중요한 명제’ 라는 이여사의 판단에 따라 김당선자는 미국행을 결심했다.

5 공 정권의 망명공작은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12월 16일 김당선자는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졌다. 출국일자는 23일로 잡혔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신문지상에 ‘가족의 요청에 의해 인도적인 배려로 병원에 옮겨졌으며 곧 가족과 함께 도미할 것. 건강은 악화상태가 아니다’ 라는 기사가 일제히 보도된 것. 김당선자는 5공 정권의 언론플레이에 분개해 여권수속을 거부했고 다시금 이여사의 설득이 필요했다. 정부당국자는 ‘23일 출국하면 24일 관련 구속자들 전원을 석방하겠다’ 고 제의하기도 했다.

마침내 23일 오후 6시 병원 앰블런스를 타고 도착해보니 비행기 트랩 앞이었다. 비행기는 대한항공이 아닌 노스웨스트 항공기였다. 김당선자 부부가 자리에 앉자마자 청주교도소 남상철 부소장(현재 교정협회 이사)이 다가왔다.
그는 양복주머니에서 종이한장을 꺼내더니 ‘형 집행정지로 석방한다’ 고 짧게 읽고는 비행기를 내려갔다.
법의 이름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던 장본인이 이제 합법적으로 청주교도소의 굴레를 벗어난 것이다.
김당선자의 망명 비행기까지 잠시 탑승했던 남부소장은 김당선자 수감당시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던 탓에 지금까지도 김당선자와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후 17년, 인동초로 다시 피다
미국으로 건너간 김당선자는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강연과 대의회 활동등 열정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83년에는 국내에 있던 김영삼씨의 단식투쟁을 계기로 ‘민주화추진협의회’ 를 구성했고 양 김씨가 공동의장를 맡았다. 마침내 85년 2월 8일 ‘신변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는 5공 정권의 으름장에도 불구하고 2년여만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가 다시 장기간 해외에 체류한 것은 지난 92년 14대 대선 패배에서 비롯됐다. 3당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 김영삼후보에게 고배를 마신 김당선자는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93년초 홀연히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캠브리지 대학의 초청을 받아 스스로 택한 야인생활을 하게된 것이다. 김당선자 부부가 영국으로 떠나기 직전 자신들이 다니던 창천감리교회 박춘화목사를 집으로 초대해 이별 인사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박목사는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후보가 승리하고 김대중후보가 패배한 것이라 말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승자도 패자도 없습니다. 지난 선거에서는 군사문화의 청산을 위해 김영삼후보가 당선되어야 하고 다흠 선거에서는 남북의 문제와 평화통일을 위해 김대중후보를 하나님께서 세워 주실지 모릅니다”라고 위로의 말을 전했었다.

이제 김당선자는 남북한 문제라는 민족적 과제 이외에 IMF 체제 극복이라는 발등을 불을 떠안게 됐다. 81년, 청주 미평의 매서운 겨울바람을 견뎌낸 인동초의 강인함으로 김당선자가 우리 모두의 소망을 굿굿하게 지켜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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