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독립운동 문화재 수집가 오성환 씨 - 보훈처 논쟁
역사적 고증 놓고 ‘3년반’
임정청사, 인천항서 ‘발목’ … “문체부에서 재조사 하라”

중국 등지를 돌며 각지에 흩어져 있는 대한 독립운동 관련 유물수집에 열정을 쏟아온 민간인 문화재수집가 오성환씨(70 청주시 사직2동). 안중근 의사의 친필 현판과 흉상, 상해 임시정부의 ‘조선 광복군 성립대회기념비’ , ‘반일 켤사대 기념비’ 등 항일운동의 역사적 고증자료가 될 귀중한 유물들이 오씨를 통해 세상에 빛을 보게됐다.

지난 90년 중국을 첫 방문한 이래 줄기차게 현지 유물수집 작업을 벌여온 오씨는 역대 정권이 소홀히 해온 상해 임시정부의 ‘역사 바로세우기’ 를 몸으로 실천한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 주인공이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 발목이 잡혀 옴짝달짝 할 수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지난 94년 5월 중국에서 전격적으로 들여온 상해 임시정부 1호 청사와 임정요인 숙소등 건물 2채의 해체 부속물에 대한 공인을 받지못해 3년이 넘도록 인천세관의 컨테이너 박스에 마냥 묵혀두고 있기 때문이다. 적지않은 사재를 털어 임시정부 청사 해체 부속물을 국내에 반입한 오씨는 오히려 빚만 떠안는 꼴이 됐다.

임정청사의 복원이라는 역사적인 꿈이 좌초된 채 국회를 통해 보훈처와 고증의 진위여부에 대한 논쟁을 계속해 왔다. 걸국 오씨는 그동안 수집한 독립운동 관련 문화재들을 저당잡히는등 경제적인 어려움에 부딪쳤고 중국 현지의 수집작업도 중단한 상태다. 과연 오씨가 들여온 임시 정부 청사 해체물의 정체는 무엇인가. 보훈처가 주장한 반대논리와 오씨측의 반론을 통해 고증에 대한 논쟁을 새롭게 조명해 본다.〈편집자〉

‘상해 제1 임시청사-요인 숙소’ ‘대한민국의 産室 돌아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헌의회 첫 회의가 열렸던 임정탄생의 요람인 상해 제1 임시정부 청사와 임정요인 숙소등 건물 2채가 75년만에 환국했다” 94년 5월 22일 조선일보 사회면 톱기사의 제목과 리드부분이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다른 신문 · 방송에서도 인천항에 도착한 역사적인 유물을 경쟁적으로 크게 보도했다.

당시 보도대용을 요약해 보면 상해임시정부 복원추진위원회 이현희 교수(당시 성신여대 국사학), 이수봉 전 충북대 교수, 유물수집가 오성환씨등 3명이 최초 임정청사로 추정되는 중국 상해 노만구 서금 (瑞金) 2로 22호 기와단층 건물의 벽돌, 기와, 등 건물 부속물을 들여왔다. 아울러 보강리에 있는 2층짜리 임정요인 숙소의 구조물 일체와 사용했던 집기, 침구류등 건물 내부시설을 중국 현지에서 해체된 뒤 컨테어너 28개에 나눠실어 3차례에 걸쳐 인천항에 들여왔다는 것이었다.

과거 군사정권에서 홀대받아 온 상해 임시정부의 산 역사를 75년만에 고국으로 옮겨오자 문민정부의 언론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김영삼 대통령도 이같은 사실에 큰 관심을 갖고 국내 반입의 장본인인 오씨를 청와대로 초청하기로 했다는 것. 하지만 보훈처에서 역사적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는 점을 들어 반대의견을 제기해 무산됐다는 것이 오씨의 주장이다.

마침내 정부에서는 임정청사에 대한 고증은 국가보훈처에서 주관 처리하고 차후 복원 사업은 국무총리실에서 총괄토록 결정했다. 이에따라 최초 임정청사 현지조사단이 구성돼 6월 20일부터 1주일동안
중국에서 조사활동을 벌였다. 보훈처 관계자와 학계 전문가 8명으로 구성된 조사단은 최종보고서를 통해 ‘최초 임정청사는 위치가 다른 곳의 건물을 반입한 것으로 확인됐고 보강리 건물은 독립임시사무소로 사용되었을 뿐이며 그 뒤 개조되어 원형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이 건물의 철거 자재를 반입 · 복원할 수 없다’ 는 결론을 내렸다.

조사단이 제시한 근거로는 상해시 문서보관소에서 1940년도 지적도를 확인할 결과 복원추진위가 제시한 서금 2로 22호는 임정 초기 김신부로(金神父路) 16호 B로 최초 임정청사의 번지인 김신부로 22호와는 다른 건물이라는 주장이었다. 임정청사 위치는 그동안 4차례에 걸쳐 지명변경이 이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최초 지명 김신부로에서 43년 黃山路- 46년 中正南 2路 - 50년 서금 2로로 바뀌어 현재까지 불리고 있으나 오씨와 복원추진위가 반입한 서금 2로 22호는 김신부로 22호와는 다른 위치라고 결론지었다. 아울러 복원추진위가 4호 청사라고 주장하는 보강리 보창로(寶昌路 · 현.회해중로)329호 건물은 지난 90년 독립기념관 자체조사 당시 보강백화 점으로 개조해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원형을 확인할 수 없었고 보훈처 조사단이 방문시에 는 이미 철거된 상태였기 때문에 세부조사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결국 오씨가 각고의 노력끝에 들여온 임정청사 해체 구하조물은 인천항 보세창고에서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3년 반이 지나도록 보관료만 눈덩이처럼 부풀리고 있는 처지가 됐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의 소재지는 독립기념관의 자체 조사결과 1919년 4월 임시정부 수립이래 12차례 이상 옮겨다닌 것으로 나타났다.

수립 당시에는 임정청사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일본인 기자가 방문취재해 본국 신문에 게재할 정도로 공개적인 활동를 벌였던 것으로 밝혀 졌다. 하지만 1919년 10월 일본은 임정청사가 위치한 프랑스 조계(租界) 당국에 대한민국 임정청사의 폐쇄를 요구해 관철시켰다. 결국 임정은 한동안 청사를 마련하지 못한채 임정요인 개인집에 사무소를 두거나 임정 주변단체의 사무소에 청사를 두는 등 자주 이전했다.

마침내 26년 3월 보경리 4호 건물에 청사를 마련하고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 이후 32년 5월까지 가장 오랫동안 청사로 활용했다. 바로 이 건물이 지난 93년 4월 삼성그룹의 3억원 지원금으로 복원시켜 일반에 공개되고 있는 임정청사로 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의거준비가 이곳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다.

현재까지 발표된 학계의 연구내용을 종합해보면 일단 오씨와 복원추진위 이현희교수가 최초 임정청사로 주장하는 김신부로 22호 건물에 대해서도 이론이 적지않다. 각종 문헌기록에는 정부수립을 위한 의정원 회의가 김신부로에서 개최되었다는 내용만 남아있을 뿐 번지를 확정할 근거는 없다는 반론이 만만치않다.

이에대해 상해임시정부 청사 기념사업회를 구성한 오씨 측은 “지난 89년 8월 임정연구에 권위가 있는 외무, 문교, 문화공보부, 안전기획부, 독립기념관 관계자를 비롯한 이현희 · 이연복 교수가 합동조사를 벌이면서 김신부로 22호(현 서금 2로 22갑호)를 최초 임정청사로 찾아내 비디오로 촬영하기도 했다. 또 19년도의 지번을 확인하기 위해 40년대 상해시의 지적도 내용을 제시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나에게 29년도의 지적도가 있으며 서금 2로 22갑 호가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음 문제는 오씨와 복원추진위가 임정요인의 숙소이자 4호 청사로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보창로 329호(현회해 중리 329호) 건물이다. 위에 적은대로 보훈처는 4호 청사 건물은 정식 임정청사가 아니라 임시사무소였을 뿐이며, 그 뒤 개조되어 원형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복원은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아울러 주장의 근거로 일본 외무성의 ‘한국민족운동사료 (중국편)’와 90년 5월 독립기념관이 제출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유적지 현지 조사보고서’ 를 들었다. 일본 외무성 사료를 보면 ‘3 · 1독립운동 사건 전후에 한국에서 상해 로 온 여운형, 선우혁, 신규식, 한진교, 김철, 현순, 손정도, 이광수등이 수모(首謀)가 되어 임시정부 조직의 의를 진행시켜 3월 하순 임시사무소를 상해 프랑스 조차지 보창로 329에 두고 운동을 개시하여 각국에 독립을 선언하다’ 라는 구절이 있다.

또 90년의 독립기념관 조사보고서는 ‘보창로 329호는 이미 상점으로 개조 사용되고 있어 원형을 확인할 수 없었다’ 고 결론내렸다.
하지만 논쟁흔 임정 4호 청사를 중국에서 철거해 온 오씨가 이 문제를 15대 국회에 탄원하면서 다시 시작됐다. 지난 96년 11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정의화 의원(당시 신한국당)은 보훈처를 상대로 한 질의에서 이 문제를 정식으로 따졌다.

오씨는 329호 건물이 19년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쓰였다는 증거물로 26년에 제작된 안중근 의사 흉상을 제시했다. 이 흉상과 관련해 문화재 위원인 이수봉 전 충북대교수는 32년 윤봉길의사 의거 이전까
지 백범 김구 선생이 항상 아끼던 흉상이라고 말했다. 진품으로 확인된 이 흉상 받침에는 ‘1926년 12월 프랑스 조차지 보창로 329호에서 상해 대한임시정부 국무령 김구등이 만들었다’ 라는 구절이 있다. 보창로 329호가 19년 뿐만아니라 26년에 임시정부 청사였다는 유력한 증거인 것이다. 이를 근거로 정의회의원은 임정 청사4호를 복원하는데 부정적인 결론을 내린 보훈처를 공격했다.

90년 독립기념관 보고서 조사내용을 보면 ‘보강리 329호 건물은 △19년 9월 6일부터 20년 8월 30일까지 임시정부 청사로 쓰였고 △건물 안쪽은 연립 아파트 및 밀집상가로 형성되었고 △지하철 공사로 철거 예정이며 △주민 반발로 내부조사가 불가능 하다’ 라고 되어 있다. 결국 조사단이 건물 안에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저 조사단은 문제의 건물이 개조되었는지 아닌지 여부를 직접 확인하지 못한 셈이다.

94년 6월 보훈처의 확인조사단과 별도로 상해를 방문한 조항래 교수(평택대 · 한국사) 는 “일제가 쓴 명칭을 그대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일제는 망명정부의 격을 낮추기 위해 임정을 ‘상해임시가정부’ 라고 썼고 임정 청사도 ‘임시독립사무소’ 라고 표기했다. 따라서 임시독립사무소는 임정 청사라고 보아야 한다”라며 보훈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사 전문가들은 이러한 갑론을박식의 논쟁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우리 현대사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임시정부의 역사를 최대한 복원시켜야 한다. 아울러 민족정신의 산교육장이 될 임정 청사 복원사업을 소홀히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여론이 높다. 따라서 보훈처에서 고증을 맡는 것보다는 문화체휵부에서 다시한번 종합적인 연구조사를 벌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특히 새 정부의 출범에 발맞춰 이같은 ‘역사바로 세우기’ 작업이 국가적인 차원에 논의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여론이다. 조선총독부 건물흘 허무는 것도 의미있지만 임정 청사를 복원하는 일은 수백, 수천배 값진 일이기 때문이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 자재 국내 반입 사건 진행 일지
90년 상해시 지하철 건설공사로 보강리 4호 청사 철거예정. 이같은 사 실을 한국정부에 통보했으나 회신없음.
91년 9월 상해시 4호 청사 철거, 오성환씨 철거물 보존을 요청해 상해시에서 철거물 보관.
93년 초 오성환씨 국내 복원추진위원회 구성.
94년 5월 4호 청사및 1호 청사 해체 구조물 인천항 도착.
94년 6뭘 보훈처 현지 확인 조사단 8명 상해시 파견.
94년 7월 현지 조사단 결과 보고, 1호 청사는 지번이 바뀌었고 4호 청사는 임시사무소로 활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형없어 사실확인 불능 판단.
95년 10월 오씨 국회 탄원서 제출, 조세형의원(국민회의) 문화체육부 질의, ‘임정청사가 아닌 구가옥으로 인정해 통관후 보관 검토하겠다‘ 는 답변.
96년 11월 국회 정의화의원(신한국당), 보훈처에 대한 질의.
97년 5월 오씨가 서울지검 남부지청에 접수시킨 보훈처 관계자 허위보고에 대한 진정서 무혐의로 종결처리.
97년 12월 상해임시점부청사 기념사업회장 오성환씨 명의로 각급 기관 진정서 발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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