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자명, 잊혀진 항일투사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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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명, 잊혀진 항일투사의 이름
  • 충청리뷰
  • 승인 1997.10.18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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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향의 꿈, 타향에 묻고 항일투사에서 저명한 농학자로

연변대 교수며 저명한 국문학자인 김병민 교수가 유자명 선생의 일대기를 본사 편집국으로 보내왔다. 유자명 선생은 항일운동의 선봉에 선 인물이며 박식한 농학자, 원예학자였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그토록 열렬하게 독립운동을 했으나 중국에서 일생을 마쳐야 했던 유자명 선생이 걸어온 길을 요약 게재한다. <편집자>

유자명(柳子明). 그는 애국지사며 정치가 였다. 스물다섯의 열혈청년이었던 그는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나들면서 젊음을 반일 구국사업에 바쳤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국땅 낯선 산하를 제집 마당 누비듯이 다녔으며 외교청년단 조직으로부터 한국임시정부, 의열단, 조선민족혁명당,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 조선민족전선연맹, 조선의용대, 중한문화협회 등 조선애국 역사의 페이지마다 유선생의 발자취가 역력히 남아 있다.

동시에 그는 박식한 농학자였다. 한국전쟁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고 중국의 호남대학 농학원, 호남농업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는 기간동안 농학연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가 제기한 세계적 벼 기원의 중심지역이 중국 운귀고원이라는 사실은 세계 농학계에서 널리 인정을 받고 있다.

그는 또 저명한 원예가였다. 연구와 고증을 거쳐 펴낸 논문 ‘중국의 장미와 세계적 장미’는 중국 근대의 장미재배 정황과 월계, 향수 등 10종의 장미가 유럽으로 전파된 과정 그리고 중국장미와 유럽 장미와의 교잡 및 산생, 생장 정황을 논술하여 중국장미의 국제적 위상을 부여했다.

그뿐 아니라 중국 남방은 기후가 조습하고 병충해가 많아 포도를 재배할 수 없다는 인식을 부정하고 수십번의 포도재배실험을 거쳐 마침내 중국남방에 포도를 재배 하도록 하는데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그래서 중국남방은 1년에 3~4번까지 포도를 수확할 수 있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유명한 농학자이며 원예가, 교수였던 유자명. 중국호남농업대학에서 30여년간 교편을 잡았던 그는 학부장, 명예학부장, 호남성원예학회 명예회장 등을 역임했다. 1985년 4월 17일 그가 호남성 장사에서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을 때 호남농업대학에서는 성대한 추도회를 갖고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중국땅에서 64년 이라는 긴 세월을 살면서 조선독립운동의 굳건한 반일투사로, 중국인민의 친근한 벗으로, 저명한 교수로 추호도 손색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중국인민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유자명, 그는 누구인가. 그는 1894년 음력 1월 13일, 충북 충주군 이안면 삼주리(지금의 충주시 이류면 영평리내 삼주마을)유지였던 유종근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7살 때부터 부친에게서 한문을 배워 항일구국에 대한 도리를 많이 들었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7살에 수원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다시 고향에 돌아 온 유선생은 충주농업학교에서 교편을 잡던 중 3.1운동을 맞이한다.

일찍이 가정과 학교에서 반일애국교양을 받은 선생은 학생들과 시위를 계획했으나, 일경에 검거되었다. 그러나 보통학교 동창 황인성의 연통을 받은 그는 이튿날 집을 떠나 서울로 올라간다. 이것이 고향땅과 처자와의 마지막 이별이 될줄은 몰랐다. 서울로 올라간 그는 외교청년단에 참가하여 반일활동을 벌이고, 그해 6월 충청북도의 대표자격을 얻게 되었다.

다시 상해로 간 선생은 임시정부에서 임시의회의원이 되었으며 의회비서로 일하게 된다. 이 때 그는 많은 애국선배들을 만난다. 도산 안창호, 단재 신채호, 김한, 강태동 등이 그들이며 후에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자명이라는 이름도 상해로 가기 직전 얻은 것이다. 비밀사업을 하려면 이름을 바꿔야 한다며 어릴 때의 흥갑, 학생 때 흥식이라는 이름을 서울임시정부 책임자의 한사람이던 홍진선생이 자명(子明)이라고 지어 주었다. 조선의 밝은 적자가 되라는 뜻이다.

충주시 이류면 출생…단재 ․ 도산등과 항일운동
한국전쟁으로 귀국 못해 중국서 농학자로 운명


그후 서울을 거쳐 북경으로 날아간 선생은 단재선생을 만났다. 당시 단재선생은 중국고대사와 조선고대사를 연구하고 있었다. 역사를 연구하는 목적은 조선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는 단재선생의 불같은 애국 정신을 숭배하며 유자명선생도 역사를 배웠다. 그외에도 망명생활은 여러나라 말을 배울 것을 요구해 중국어와 영어 등을 익혔다.

한편 김약산(김원봉)과의 만남은 유선생이 의열단에 가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여기서 통신연락과 선전을 책임지고 이동녕, 이시영, 김구, 조완구 등의 주요인물 들과 연계를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명한 순국의사 나석주는 유선생이 김창숙 선생께 소개한 인물이다. 나석주가 일본 동양척식회사에 가서 거사할 때, 김창숙 선생과 유선생은 천진까지 찾아가서 돈 1500원과 폭탄, 권총을 넘겨주었다. 혈혈단신으로 적진을 향해 원수들을 죽이고 자 결하러 떠나는 나석주와 “우리 지하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며 작별을 고하기도 했다.

1928년 2월 7일, 선생은 김번과 함께 한구로 건너가 안동만, 최원, 최승년을 만났다. 3.1운동를 기념하기 위해 그곳으로 갔으나 무한공안국 경찰과 일본영사관 특무들이 들이닥쳤다. 그러나 선생은 일본인 앞에서 끝까지 중국사람인체 하고 중국측 경비사령부의 도움으로 6개월만에 풀려난다. 이 때 함께 잡혔던 이관해는 병에 걸려 세상을 떴고 최원과 최승년은 일본인들의 정탐활동에 걸려 다시 체포되고 말았다. 그만큼 일본인들의 경계가 삼엄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남경으로 간 선생은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에서 일을 하게 된다. 이 시기가 그의 인생의 갈림길이었다. 생계를 위해 여기저기서 일을 하고 교육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으며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손문학설’을 조선말로 번역하는 한편 하문 천주여명중학교에 가서 생물학도 가르쳤다. 이어 1930년부터는 상해 입달학원 농촌교육과에서 일도 하였다.

이 무렵 선생은 10여년간의 망명생활끝에 1933년, 중국 관동출신의 유칙충(劉則忠)과 결혼하고 등몽선, 파금, 모일파, 노검파 등을 알게 되었다. 또 조선혁명운동의 통일에 관한 글을 써서 남화통신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아우러 37년 조선민족전선 연맹 결성 당시 유선생은 조선무정부주의 연맹의 대표를 맡았다.
일본침략군과 싸우던 그 기나긴 나날, 선생이 중국땅 몇천만리를 답사했는지 상세한 기록은 나와 있지 않다. 호남, 광동, 광서, 북경, 상해, 강소, 호북, 사천, 복건등 큰 곳만 세어도 다 못셀 정도다. 그 목적은 단 하나, 조국의 독립에 있었다. 그러나 후에 그의 귀국행은 영원히 막혀 버리고 말았다.

대만에 있을 당시 1950년 1월 1일, 신년경축모임에서 대만의 정세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귀국신청을 했으나 중국국적을 취소하는데 반년이 걸리다 보니 그해 6월 24일행 기륭으로부터 향항으로 떠나는 배표를 사게됐다. 향항에 도착했을 때는 6월 25일. 때마침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인해 선생은 가족들과 중국에 정착하게 된다.

선생은 학식도 풍부하고 사상도 깊어서 모든 진보단체에서는 누구나 훌륭한 인재로 생각했다. 글도 잘쓰고 재능도 다방면에서 뛰어났다. 40년 3월 선생은 속동의 초청으로 복건성 농업개진처의 농업시험장 원예계 주임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고대 농업저서와 원예저서를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농업전문기술을 발명해냈다. 여기서 복건성정부 주석 진의와 신임주석 류건서, 비서장 정성령을 알게 되었고 성 군구참모장 진유신도 만다게 되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3살난 딸을 토사병으로, 5살난 아들을 악성학질로 앓는 아픔도 겪었다.

일본이 투항하자 많은 사람들이 대만으로 건너갔다. 선생도 그곳으로 가서 농림청 기술실주임 등을 역임하고 농장을 세우는 등 적잖은 일을 했다. ‘대만농업기계화의 시험 및 현실의 제문제’ ‘농업건설과 생산기술’ ‘대만의 향화식물’ ‘합작농장과 농업합작의 여러 가지 형태’ 등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학술문제를 교류했다.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을 찾으려고 이국 땅 험한 곳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싸운 나 날, 가슴터지는 흥분으로 손꼽아 기다리던 광복을 이국에서 맞이하였고 오매불망 그리던 귀국길에 올랐건만 전쟁으로 막혀버린 뱃길. 선생은 끝내 중국땅에서 눈을 감았다. 지금 중국에 있는 딸은 북경과학기술대학에서 물리학교수로 재직중이고 아들은 호남대학에서 건축학교수로 재직중이다. 그러나 부인은 85년 세상을 떠났다.


김병민
1952 흑룡강성 녕안현 출생
1978 연변대학 입학
1982 연변대학 조문학부 교원 1986 김일성종합대학교 문학 준박사
1990 연변대학 문학박사
현재 연변대학 사범학원장

주요저서 /
조선 북학파 문학연구(목원대 출판부)
조선문학사(근, 현대부분)
조선현대문학비평자료집(1~8)
단재신채호 문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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