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 황간면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유가족 국가배상 청구소송

 지난 8월 25일 오전 10시 청주시 수곡동 청주지검 민원실에 10여명의 노인들이 들어섰다. 50대 후반에서 70대까지로 보이는 이들은 지난 47년 간의 한을 한 장의 고소장에 담아 영동에서 청주까지 발걸음을 옮긴 사람들이다.

 여느 집단민원처럼 어깨띠를 두르거나 목청을 높이는 일은 없었지만 참석자들은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 청주지검에서 접수된 민원은 대한민군 정부를 상대로 한 손 · 상해배상 청구소송이었다. 이들은 6 · 25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과 총격으로 가족을 잃게 된 유가족들이었다.

 2백 명 이상의 비무장 양민이 살해된 현장은 바로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충청리뷰》는 지난 94년 6월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에 대해 집중 보도한바 있다.

 6 · 25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군의 유일한 양민 집단학살사건으로 지목되고 있는 ‘노근리 학살사건’은 그때 당시 현장에서 아내와 아들, 딸 남매를 잃은 정은용 씨(74 · 대전시 가수원동)에 의해 세상에 공개됐다. 지난 94년 4월 학살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토대로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 라는 제목의 실화소설을 발표한 것이다.  정씨는 미군의 만행을 자전적 소설로 세상에 고발한 뒤 피해 유가족들과 함께 ‘노근리 양민 학살사건 대책위원회’(위원장 정은용)를 구성했다.

 정씨는 지난 60년 미국 정부가 6 · 25 전쟁 당시 피해배상을 위해 서울에 소청사무소를 개설 했다는 신문기사를 읽고 유가족들의 연명을 받아 ‘노근리 학살사건’ 의 전말을 담은 소청서를 제출 한바 있다. 하지만 당시 담당관은 “법정기한 경과 후 제출된 것이기 때문에 서울 소청사무소에서는 심의할 권한이 없다”는 짤막한 회신을 보내왔을 뿐이다. 이후 30 여 년 동안 권위적인 군사정권과 한미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침묵 속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년의 나이에 접어든 유가족들은 시대적 상황의 변화에 따라 마침내 본격적인 진상규명 과 피해배상을 요구하고 나선 것 이다.

 대책위는 우리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 전에 이미 미국 정부와 주한미군측에 사건의 전말을 적은 진정서를 보내 진상규명 노력을 촉구한 바 있다. 하지만 주한미군 배상사무소측은 ‘적과 교전중 일어난 사건으로 판단되며 따라서 법적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결국 한미 양국 정부의 외교적 체널이 가동되지 않는 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힘든 상황이다.

 대책위 또한 이같은 판단을 전제로 우리 정부를 상대로 본격 소송을 제기해 외교적 노력을 촉구 하고 나선 셈이다. 과연 50년 7월 노근리에서 어떠한 살육전이 벌어졌는지 대책위 정 위원장이 발간한 실화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의 내용을 간추려 정리해 본다.

 4일간의 터널지옥
 6 · 25 전쟁 발발 당시 남쪽의 미군 전투력은 공군병력 약간에 불과했다. 당시 일본 오사카 지역에 24, 25사단 등 전투병력이 주둔해 있던 미군측은 북한군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크게 당황했다. 개전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됐고 다행히 북한이 서울에서 3일 동안 머뭇거리는 사이 일본의 미주둔 병력이 한반도로 급파됐다. 마침내 7월 10일 오산 죽미령에 전열을 정비한 미군과 북한군 사이에 첫 교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대전차 무기까지 갖춘 미군 선발대 스미드 부(대대병력)는 파죽지세의 북한군 탱크를 단 한 대도 격파하지 못한 채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특히 대전지역에서 미군이 당한 피해는 상당 했다. 민간인 복장으로 변장한 일단의 북한병력들이 시가지로 잠입, 곳곳에서 퇴각을 서두르는 미군을 저격했다. 심지어 일선에서 진주지휘에 나섰던 당시 24사단 장 딘 소장은 부대와 연락이 두절 된 채 산을 타고 남하하다 경북점촌 부근에서 북한군에 생포되는 어이없는 상황까지 벌어질 정도였다.

 개전 초 북한군의 전력을 얕보고 대응했던 미군은 예상밖의 피해가 속출하자 강력한 대응수단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 하나가 피난민을 가장한 북한군 색출명령이었다. 7월 20일 대전지역 방어전에서 감쪽같이 당한 미군이 서둘러 내린 자구책이었다. 하지만 이 명령이 엄청난 불상사를 초래한 화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미군이 대전을 빼앗긴 지 3일 만인 7월 23일 정오 무렵, 충북 영동군 황간면 주공리 마을 앞에 미군 지프가 한 대가 멎었다. 미군 장교 · 병사와 함께 내린 한국 경찰관은 미군장교의 말을 받아 모여든 주민들에게 전달했다. “이 마을에서 곧 전투가 벌어질테니 한 사람도 남지 말고 한시바삐 피난을 떠나시오." 그렇찮아도 하루가 다르게 불어나는 마을 앞 국도 변의 피난민 행렬에 마음 졸였던 주민들은 너나없이 짐을 꾸리고 가족들을 불러들여 피난길에 나섰다.

 어린아이, 노인 할것없이 이고 지고 나선 이날의 피난행렬은 그리 멀리 가지 못했다. 불과 2㎞ 떨어진 임계리의 산기슭에서 비를 피하며 하룻밤을 지새야 했다. 이날 밤부터 양측의 포격전이 벌어져 쉴 새 없이 불덩어리가 하늘을 갈랐고 폭파진동과 파열음으로 한잠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인 7월 25일 저녁 여자들이 부산하게 저녁식사 준비를 하는 가운데 10여 명의 미군들이 트럭을 타고 들이닥쳤다. 이들은 통역을 통해 “트럭에 태워 남쪽의 안전지대로 피난시켜 줄테니 모두 집합하라”고 지시했다. 앞다투어 다시 모인 사람들은 주공리, 임계리 주민들과 외지 피난민을 포함, 줄잡아 5백~6백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밤길을 더듬어 미군들의 인도를 받아 남행을 계속했다.

 하지만 대부분 가족단위인 피난민들의 걸음은 더디게 마련이었다. 그러자 인솔 미군은 ‘까뎀, 까뎀’ 을 연발하며 빨리 걷도록 재촉하는 등 심상치 않은 낌새를 보이기 시작했다. 국도를 따라 1.5 km쯤 걸어가자 인솔자는 영동군 하기리의 군용 임시비행장으로 피난민들을 몰아부쳤다. 피난민들에게 모두 땅바닥에 엎드리도록 지시한 뒤 날이 샐 때까지 고개도 들지 말고 움직이도 말라고 명령했다. 미군병사가 감시의 눈초리를 겨눈 가운데 불안한 하룻밤이 또 지나갔다. 하지만 날이 새고 난 뒤, 주변에는 미군의 그림자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밤새 퇴각한 것이 분명했다. 우왕좌왕 하던 피난민 가운데 일부는 ‘죽어도 집에서 죽는게 낫다’ 며 다시 마을로 돌아갔고 확인 사망자 1 백여명의 사람들이 다시금 남행 길을 재촉했다.

 학살명령을받은 미군들
 7월의 뙤약볕 속에 지친 몸을 간신히 움직이던 피난민들이 막 황간면 노근리로 접어들 무렵, 미군 병사 4~5명이 행렬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손짓발짓으로 피난민들에게 도로에 인접한 언덕배기 경부선 철도 위로 올라가도록 지시했다. 사람과 가축들 할것 없이 모두 집합시킨 뒤 하나하나 각자의 짐보따리를 뒤지기 시작했다. 별다른 이상 없이 소지품 검사가 끝나자 한 미군이 무전기로 어딘가에 연락을 취했다. 피난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들의 눈치 만 보고 있었고, 잠시 후 경비행

 전투기 폭격 ․ 기관총 난사로 2백여 양민 참사
미당국, 대책위 진정에 “책임없다” 발뺌 일관
노근리 학살사건은 ‘자유민주주의 파수꾼’을 자처한 미국이 전쟁을 통해 자행한 가장 잔혹하고 대규모적인 양민학살극이다. 2차대전 중에도 베트남전에서도 찾아볼 수없는 끔찍한 전쟁범죄 행위였다.

기 한 대가 날아와 이들의 머리 위로 선회비행을 했다. 어린아이 들은 신기한 듯 손을 흔들며 사라져가는 경비행기를 아쉽게 바라보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피난민들은 가족끼리 요기도 하고 소 그늘에 앉아 더위를 식히는 등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경비행기가 사라지고 10여 분이 지나자 이번에는 일명 ‘쌕쌕이’ 라고 불리던 미군 전투기 2대가 나타났다. 전투기가 접근해 오자 미군들은 황급히 철도 아래로 몸을 피했다. 하늘을 가르는 엔진소음과 함께 검은 물체가 이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떨어졌다. 강렬한 폭음과 함께 사람과 소와 흙더미가 사방으로 날았다. 목이 잘린 소가 분수처럼 피를 흩뿌렸다. 식사를 하던 일가족이 사방에 널린 수저, 밥그릇과 함께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참혹한 모습으로 숨졌다.

다시 접근한 전투기는 이번에 는 기관총 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몸을 숨기기 위해 철도 아래 국도쪽으로 내달렸다.

공습현장에서 1백m 가량 떨어진 철도 굴다리 터널까지 2백여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비행기 사격으로부터 몸을 숨기기에는 가장 안성마춤의 장소였기 때문에 흙먼지와 피자웃으로 얼룩진 피난민들이 꽉 들어찼다. 순식간에 벌어진 살육전에 얼이 빠진 사람들은 자기 가족들을 찾느라 두리번거릴 뿐 어느 누구도 말문을 열지 못했다.

전투기가 사라지고 얼마가 지나자 위생병으로 보이는 미군병사 2명이 두리번거리며 터널 안으로 들어섰다. 이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듯 부상자들에게 간단한 치료를 해 주었다. 당시 서울 연희대학에 재학중이던 정구일 군이 영어로 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양민이다. 왜 우리를 죽이냐? 빨리 남쪽으로 피난을 갈 수 있게 해달라.” 그러나 미군 위생병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전에서 피난민을 가장한 인민군 에게 우리 미군이 엄청나게 당했다. 따라서 의심나는 피난민은 모두 죽이라는 상부의 명령이다.” 응급치료를 마친 이들은 더이상 대꾸도 없이 터널을 빠져나갔다.

군 위생병의 얘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감히 밖으로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터널 속은 7월의 복더위와 가족을 잃은 피난민들의 흐느낌으로 숨이 막히도록 답답했다. 참다못한 한 여자가 터널 밖으로 나섰다. ‘땅, 땅’ 총소리와 함께 그녀는 맥없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잠시 후 반대 쪽 터널 입구쪽에서 총소리가 나면서 그곳에 서 있던 남자 한 명 도 총에 맞아 숨졌다. 미군은 멀리 떨어진 산기슭에 기괸총을 설치하고 터널을 겨냥한 채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총질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공포로 얼룩진 긴긴 하룻밤이 지나갔다. 먹을 것 하나조차 챙기지 못한 사람들은 터널바닥을 흐르는 물로 목을 축였다. 더위와 굶주림과 불안감에 사로잡혀 밖으로 나서려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총알받이가 되고 말았다. 야간에는 터널 입구에 그림자만 얼씬 해도 총격을 가해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견디다 못한 일부 청년들이 “남은 사람이 라도 살아야 한다”며 터널 양 끝에 시신을 쌓아 올렸다. 불의의 총탄을 막기 위한 ‘방패막이’ 인 셈이었다.

바닥폭 7.1m, 길이 23. 7m, 높이 l0m의 아치형 쌍동이 터널 안에서 벌어진 50년 7월 여름의 참상은 차마 말로 다 옮기지 못할 지옥이었다.

탄생과 죽음의 서글픈 가족사
심지어 임계리 주민인 조남일 씨(당시 32세)는 만삭의 부인이 경황중에 진통을 하게 됐다. 공포의 어둠 속에서 고통을 참아내려는 산모의 신음소리는 절박했다. 마침내 시어머니의 도움으로 무사히 옥동자를 낳았다. 그러나 안도의 순간도 잠깐, 답답한 심정을 가누지 못한 시아버지가 터널 입구쪽으로 몇 발짝 떼는 순간 요란스런 기관총 소리가 쏟아졌다. 시아버지 조노인은 어깨쪽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시어머니가 깜짝 놀라 달려갔으나 또다시 총탄이 날아왔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져 움직이질 못했다. 시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고 조노인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 하지만 부인의 죽음에 이성을 잃은 조노인은 어둠이 잦아들자 아들 남일씨를 부추려 집으로 가자고 나섰다. “여기서 죽으나 가다 죽으나 매일반 아니냐, 어서 가자” 팔에 관통상을 입은 산모는 간난 아이를 안을 수조차 없어 핏덩어 리를 남겨둔채 시아버지를 등에 업은 남편을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들 세가족은 이날 밤 무사히 미군의 감시망을 벗어나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세상 햇빛 한번 쬐지 못한 갓난아기는 어미 없이 이틀을 버둥거리다 하늘나라로 떠났다. 탄생과 죽음의 서글픈 가족사가 불과 이틀밤 사이에 벌어진 것이다.

이후 남정네와 소년들은 심야를 이용해 눈에 띄지 않도록 흰옷과 고무신을 벗고 하나둘씩 터널을 기어나와 탈출에 성공했다. 이제 남은 사람들은 노인과 여자, 어린아이들이었다. 터널안에는 시신에서 번져나온 악취와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핏물이라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끔찍한 학살극이 벌어진 지 4일째 되는 7월 29일 아침, 날이 훤하게 밝았을때 미군병사 4~5 명이 터널 입구에 나타났다. 그들은 다짜고짜 터널안으로 총구를 겨눈채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그나마 살아 있던 몇몇 사람과 시체에 탄환이 퍽퍽 박혔다. 한참 총질을 하던 미군들은 더이상 기척이 없자 조급한 듯 퇴각을 서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지막까지 죽은 척하며 시체더미에 깔려 있던 몇몇 사람들은 어렴풋하게 한국말 소리를 듣게 된다. 퇴각하는 미군을 뒤쫓던 인민군들이었다.

“아, 동무들 안심하시라요. 미군 간나새끼들 다 도망갔으니 밖으로 나가시라요. 집으로 돌아가라요” 4일간의 터널지옥에서 천우신조로 살아남은 사람은 20여명(탈출자 제외), 숨진 희생자는 대략 50여 명에 달했다. 철도 위에서 폭격으로 숨진 희생자를 합치면 줄잡아 2백여 명(대책위 확인 사상자 1백18명)의 비무장 양민들이 미군의 만행으로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살아남은 아이들 가운데는 학살극의 후유증으로 경기를 일으켜 숨지는 경우 도 발생했다.

노근리 학살사건은 ‘자유민주주의의 파수꾼’ 을 자처한 미국이 전쟁을 통해 자행한 가장 잔혹하고 대규모적인 양민학살극이다. 2차대전 중에도 베트남전에서도 찾아볼 수없는 끔찍한 전쟁범죄 행위였다. 이제 47년의 세월이 흘러 그때의 증인들은 대부분 고령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한 그들의 마지막 노력을 우리 정부와 미국측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진실을 호도하는 것 못지않게 진실을 외면하는 것 또한 중대한 역사 왜곡이다. 노근리 학살사건을 소수의 아픔이라 해서 외면한다면 우리 모두는 역사에 대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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