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출신 개화기 경제개혁가, 귀향하다 용인서 봉변
함종 어씨 종친 어준선 전 의원, 선대부터 인연 공개

▲ 2월17일은 지금으로부터 116년 전 구한말의 개화파 정치인 어윤중이 타살된 날이다. 그와 동향(보은)이자 함종 어씨 종친인 어준선 전 국회의원(사진 오른쪽)은 “어윤중이 아관파천 후 보은으로 피신하는 과정에서 여장을 하고 가마를 탔으나 용인에서 발각돼 죽임을 당했다”고 밝혔다.
구한말 탁지부(현재의 기획재정부) 대신이 여자로 꾸미고 꽃가마를 탄 채 고향으로 도피하던 중 향반 무리가 동원한 머슴들이 휘두른 몽둥이질과 돌팔매를 맞고 숨을 거둔다. 116년 전 오늘(1896년 2월17일)의 이야기다. 사극의 클라이맥스와도 같은 극적인 장면은 조선 후기의 온건파 개화사상가 어윤중(1848~1896)의 최후다.

이같은 사연을 증언한 사람은 보은·옥천·영동에서 15대 국회의원을 지낸 어준선 (주)안국약품 명예회장이다. 어 회장은 어윤중과 같은 함종 어씨 양숙공파로, 가까운 일가는 아니지만 항렬 상 조카뻘이 된다. 어 회장은 “당시 집안사람이 어윤중의 가마를 메고 내려오다 그와 같은 봉변을 당했다. 그 지경을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보은까지 와서 당시 상황을 전함에 따라 일가친척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어 회장이 전한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친러세력이 집권한 아관파천으로 온건 개화파들이 위기에 처했다. 개화당은 대부분 일본 망명길에 올랐으나 어윤중은 이를 거부하고 고향인 보은 행을 택한다. 꽃가마를 타고 새색시로 위장해 이동하다가 용인 어사리고개 주막에 머물게 된다. 어윤중은 가마에서 내리지 않았으나 호기심이 발동한 주모가 가마의 문을 열어보면서 정체가 탄로 났다. 결국 종중의 산송(山訟) 문제로 갈등을 빚어오던 향반 무리가 보낸 머슴들에 의해 맞아죽었다.”

어윤중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그가 최후를 맞은 용인시 이동면 천리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탁지부대신 어윤중은 아관파천 후 그를 타살하려는 관군의 추격을 받게 되자 여인 행색으로 가마를 타고 도주한다. 밤낮으로 달려 어느 마을에 이른 어윤중은 아이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다.

아이의 대답은 ‘서울에서 약 150여 리쯤 떨어진 어비울이라는 것이었다. 물고기 어(魚)에 슬플 비(悲), 답답할 울(鬱)자를 쓰는 곳이었다. 어윤중이 불안함을 느껴 떠나려던 찰나에 관군이 당도했고 군정들이 휘두른 쇠도리깨에 맞아 숨을 거뒀다.” 이는 1977년 마을주민 이영구가 구연한 것을 채록해 1985년 출간한 <내 고장 옛 이야기>에 수록한 내용이다.

대동소이한 두 이야기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지명이다. 이동면 천리의 옛 지명은 ‘어사리’ 또는 ‘어비울’이다. 어윤중의 성씨인 ‘어(魚)’자가 들어가는데다 어사리의 ‘사’가 죽을 사(死), ‘비와 울’ 또한 슬픔(悲)과 답답함(鬱)이라니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나 호사가들이 상상력을 발휘해 설화적 요소를 첨가했는지도 모른다. ‘어비(魚肥)울’은 ‘물고기가 살찌는 마을’이라는 해석이 왠지 더 설득력이 있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동학, 비도 아닌 민당이라 규정

어윤중은 1868년(고종 5년) 지방유생 50명을 뽑아 바로 전시(殿試)를 볼 수 있게 하는 ‘칠석제’라는 자격시험에 장원급제했다. 이듬해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정원 주서로 관리생활을 시작했다. 30살 때 전라도에 암행어사로 파견돼 고을을 샅샅이 돌아다니면서 탐관오리들을 징벌하고 돌아왔으며, 파격적인 개혁안을 내놓아 고종과 대신들을 놀라게 했다. 농민참상의 원인이 조세 수탈에 있으며 잡세 혁파와 도량형 통일을 주장한 것이다.

어윤중이 정계의 주요인물로 등장해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881년 신사유람단 60명을 일본에 파견할 때 대표단으로 선발되면서부터다. 박정양, 홍영식 등과 함께 시찰단의 중심인물이었으며, 재정·경제 부문을 담당했다.

어윤중은 4개월 정도 일본에 머물며 메이지유신의 시설·문물·제도 등을 상세히 시찰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또 수행원인 유길준과 윤치호를 일본에 남겨둔 뒤 청나라 톈진으로 건너가 중국의 개화정책을 견문하고 연말에 귀국했다. 귀국해서 만든 보고서는 초기 개화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93년에는 고향인 보은에서 대규모 동학집회가 열리자 변란지역의 임시관직인 ‘순무사’로 파견된다. 어윤중은 동학에 대해 처음으로 ‘비도(匪徒)’ 대신에 ‘민당(民黨)’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동학의 주장에 부분적이라도 공감을 나타낸 것으로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얻은 반면 관료들로부터 빈축을 사게 됐다.

어윤중이 아관파천 후 일본망명 대신 귀향을 택한 것도 농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어준선 회장은 이에 대해 “보은 종곡리에서 동학교도와 담판을 벌였다고 들었다. 동학지도자가 ‘고위관료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자 어윤중은 ‘불붙인 장작더미에 올라가도 좋다’며 물러서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어윤중은 1894년 갑오경장 내각이 수립되자 김홍집 내각과 박정양 내각에서 탁지부 대신을 맡아 재정·경제부문의 대개혁을 단행했다. 특히 잡세 및 무토궁방세 혁파, 조세법정주의에 의거한 조세제도 개혁은 농민층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켰다.

▲ 어준선 안국약품 명예회장은 9년 동안 고향의 후학 360명에게 1억800만원의 장학금을 수여했다. 사진은 2월13일 장학금 전달식.

어준선 조부가 어윤중 아들 가르치고
어윤중 손자집에서 어준선 대학 다녀

1996년 자민련의 녹색바람을 타고 남부3군에서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어준선 안국약품 명예회장은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61학번이다. 당시 어 회장이 생활했던 곳은 어윤중의 손자인 어강의 흑석동 자택이었다. 이에 앞서 어 회장의 조부는 보은군 삼승면에 있는 어윤중 가(家)에서 아들인 어영선의 글을 가르쳤다고 한다. 어 회장의 말대로 “촌수를 따질만한 사이는 아니지만 함종 어씨가 흔한 성이 아니다보니 일가친척처럼 지낸 셈”이다.

어 회장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자민련 후보자리를 박준병 후보에게 내주고 무소속으로 출마했다가 낙선한 뒤 정계를 떠났다. 어 회장은 자신이 보수정객이었음을 전제한 뒤 “기업으로 다시 돌아왔으니 웬만하면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정치권을 바라보면 걱정이 앞선다. 연말 대선에서 민주통합당이 집권할지는 모르겠으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나타냈으면 좋겠다. 한나라당도 종잡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어 회장은 정계를 떠난 이후 고향 청소년들에게 매년 1200만원씩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어 회장이 전액 사비로 후원하는 한마음장학회를 통해 보은지역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중학생 40명에게 30만원씩 9년 동안 1억800만원을 지원해 온 것이다. 어 회장은 2월13일에도 보은교육지원청을 찾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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