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精選 목민심서>(다산연구회 옮김·창비)

▲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 : 1762~1836)이 수령의 지침서로 지은 책.
소종민(공부모임 책과글·인권연대 숨 회원)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목민심서>는 어제의 책이다. 그러나 한편, 내일의 책이기도 하다. 왜 그런가. 1800년 정조(正祖)가 죽자마자 다산은 신유사옥(辛酉邪獄)에 연루되어 40세에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한다. <목민심서>는 강진 유배에서 풀려난 1818년에 완성된 책이다.

그러므로 2012년 오늘의 시점에서 볼 때, 어제의 책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내일의 책이라고 하는가? 그 단서는 서문에 있다. 다산은 그 서문에 “‘심서(心書)’라 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목민할 마음은 있으나 몸소 실행할 수 없기 때문에 ‘심서’라 이름한 것이다”라 고 밝힌다. 다산 스스로도 실행할 수 없었고 사후에도 목민(牧民)은 실행된 바 없었고, 책이 완성된 지 200년 가까이 흐른 이 시대에도 다산의 뜻에 어울리는 정치는 찾아볼 수 없다.

<목민심서>는 아무 데나 펼쳐도 의미심장하다.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척하고 정사를 물 흐르듯 막힘없이 처리하는 것은 수령이 아전의 술수에 떨어지는 원인이 된다.”(吏典六條, 束吏) 다산의 설명대로, 새로 온 수령이 까다롭고 일의 근본을 캐어묻는 경우에는 노회한 아전들이 서로 “고달플 징조인 것 같다”고 말하지만, 일 처리를 물 흐르듯 쉽게 하는 경우에는 서로 웃으면서 “그 징조를 알 만하다”고 한다. 오늘에도 통용되는 말 아닌가?

또 다른 데를 보자. “수령의 생일에 여러 아전과 군교들이 성찬을 바치더라도 받아서는 안 된다.” 왜 그런가? 그들이 바치는 성찬은 모두 백성에게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라고 다산은 말한다. 이어 ‘어민들의 고기를 빼앗으며, 촌락의 개를 때려잡기도 하고, 메밀과 기름을 절에서 뺏어오기도 하고, 주발과 접시를 질그릇 집에서 가져오기도 하니, 이것은 원한을 거둬들인 물건인 것이다’라고 밝힌다.(律己六條, 淸心) 제 생일날을 방방곡곡 널리 떠들어 성대히 잘 챙겨먹는 공직자들은 지금도 위아래로 넘쳐난다.

▲ 목민심서48권 16책. 필사본. 전라도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해배(解配)되던 해인 1818년(순조 18)에 완성한 것으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사서를 비롯해 자(子)·집(集) 등에서 치민(治民)과 관련된 자료를 뽑아 수록함으로써 지방관리들의 폐해를 제거하고 지방행정을 쇄신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목민심서>는 총 12부 72조로 구성되어 있다. 한 고을의 수령이 부임해서 해관(解官), 즉 자리에서 풀려나 떠날 때까지 지켜야 할 규율과 실천해야 할 임무를 상세히 제시하고 있다. 한 고을의 수령이란 요즘으로 치면 동장, 구청장, 면장, 군수, 시장 등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의 지방행정체계에서 수령은 부윤, 대도호부사, 목사, 도호부사, 군수, 현령, 현감 등이기 때문이다.

다산은 <목민심서>의 첫 장에서 “다른 벼슬은 구해도 좋으나 목민의 벼슬을 구해서는 안 된다”(赴任六條, 除拜)고 했다. 벼슬을 구한다는 것은 자리 청탁을 넣는다는 뜻이니, 민(民)을 다스리는 벼슬은 청탁 따위로 얻을 자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수령의 직분은 덕이 있더라도 위엄이 없으면 제대로 할 수 없고, 뜻이 있더라도 밝지 못하면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니, 제대로 할 수 없는 경우에는 백성이 그 해독을 입어 괴로움을 당하고 길바닥에 쓰러질 것’이라고 다산은 말한다.

<목민심서>가 널리 읽히고 실천되었어야 할 1800년대는 민란의 시대였다. ‘삼정의 문란’이 그 원인이었다. 삼정(三政)이란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곧 토지·의무군역·조세제도를 가리키는데, 지방 수령들의 타락으로 이 삼정은 백성의 모든 것을 수탈하는 가혹한 수단이 되었다.

다산의 말 그대로였다. 수령이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백성이 쓰러진다. 토지 중심의 봉건제가 그 밑바닥에서부터 부패하고, 상업과 화폐, 임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자생적인 자본주의의 흐름과 정면으로 충돌했다.

특히 1862년에는 전국 70여 개의 고을에서 농민들이 관아를 습격, 방화한 뒤 창고의 곡식을 털어가는 거대한 민란이 일어났다. 국체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다산은 <목민심서>를 통해 공직자들의 청렴한 처신과 공평무사한 실천이 국체를 유지하는 근간임을 밝혀 세세히 그 방법을 제시하였지만, 그 노고는 물거품이 되었다.

20세기인 1900년대 역시 참담하고도 격렬했다. 조선 사회는 한국 사회로, 봉건제는 자본제로, 군주제는 입헌공화제로, 농촌 중심에서 도시 중심으로, 왕과 사대부의 권력은 시민과 의회, 정부의 권력으로 가능한 한 모든 것이 탈바꿈된 시대였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경직되어 부패하는 모든 관계는 오래 전부터 존중되어 온 관념과 함께 녹아내렸고, 새로 생겨나는 것조차 미처 자리를 잡기도 전에 이미 낡은 것이 되는 시대였다.

<목민심서>의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기반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이 책의 핵심은 여전히 살아 있으나 다산의 ‘심서’는 21세기인 오늘도 ‘심서’로 남아 있다. 오늘의 뉴스에는 온통 중앙과 지방 관리들의 부패와 수탈 소식이 끊이지 않는다.

목전의 이익에 혈안이 되어 이리떼처럼 먹잇감에 달려드는 무리들이 곳곳에서 발톱을 세우고 있다. 공평무사(公平無私)하고 청렴(淸廉)한 공무원을 가리는 구름장들을 걷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다산의 유지(遺志)를 받들 때다. 어제를 기억해 오늘을 살피고 새로운 내일을 꿈꾸는 게 역사가 주는 가르침이다. <목민심서>는 내일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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