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레드컴플렉스’ 벗어난 뒤 대선·총선서 민주당 성향
약자에 의리 … 총선결과 따라 견제·동정론 고개들 수도

양대 선거의 해, 지역 판도를 읽는다
역대 대통령 선거로 본 표심

충북을 일컬어 각종 선거의 캐스팅보트라고 한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다. 일단 충북은 3% 규모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은 영·호남이 지역감정으로 갈라지고 강원도가 한동안 보수색채를 띠던 상황에서 충북의 표심이 기가 막히게 전체 선거결과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북의 결정이 전국의 선택과 일치했다고 해서 결과를 좌우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김영삼 대통령이 민자당 후보로 당선된 1992년 이전까지 충북은 ‘여농야도(與農野都·농촌은 여당을 찍고 도시는 야당을 찍는다)’의 기조 속에서 전체적으로는 보수정권의 표밭이었다. 20~30대만 해도 믿기지 않겠지만 40대 이상은 ‘김대중은 빨갱이’라는 얘기를 들으며 자랐다.

6·10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실시된 1987년 13대 대통령선거는 김대중(평민당), 김영삼(민주당) 두 야당지도자가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들의 후보단일화 요구를 외면하고 민정당 노태우 후보와 맞붙은 선거다. 결과는 노태우 828만여 표, 김영삼 633만여 표, 김대중 611만여 표로 ‘합쳤더라면’ 야권이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선거였다. 주목할 만한 것은 전국적으로 YS와 DJ가 호각지세를 이룬 것과 달리 충북에서는 김영삼 21만 3851표, 김대중 8만 3132표로 3배에 가까운 격차를 보였다는 사실이다.

김영삼이 3당 합당의 산물인 민자당 후보로 나선 14대 대선까지도 충북은 튀지 않았다. 변화는 김대중이 정계은퇴 약속을 뒤집고 출마한 1997년 15대 대선에서부터 시작됐다. 김영삼 정권 말기에 IMF 경제위기에 처한 것이 야당으로 첫 정권교체의 결정적 계기가 됐지만 충북의 표심은 확실히 과거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전국적으로 1.5% 차라는 초박빙의 승부를 치른 반면 충북에서는 김대중 36.7%, 이회창 30.19% 득표로, 6% 이상 차이를 보였다.

2006년까지 한나라당 판

이회창이 한나라당 후보로 다시 나선 2002년 16대 대선에서도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48.47% 대 46.17%로, 2.3% 차의 진땀 승부를 재현했다. 그러나 충북은 민주당을 향해 조금 더 기울었다. 두 후보의 득표율은 노무현 49.78%, 이회창 42.35%로 7.43% 벌어졌다.

15·16대 대선에서 충북이 민주당 계보 정당에 전국적인 지지율 이상의 지지성향을 벌인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분석할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19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충북의 기질이 야당성향으로 돌아선 것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민주당 성향의 정가 소식통 A씨는 “충북의 김대중 지지는 약자를 동정하는 충북인의 기질에 따른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지방선거에서까지 민주당이 승리하기까지 이로부터 13년이 걸린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당시 국민회의 내에서도 충북의 선거결과를 놓고 의아해했다”고 주장했다.

A씨는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에 대해서도 “수도권 등 기득권층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 비해 행정수도 이전 등 지방분권을 주장한 노무현 후보의 공약이 먹힌 것이 1차적이다. 선거 초반 전혀 주목받지 못하다가 당내 경선에서 이른바 노사모 돌풍을 일으킨 것도 약자를 응원하는 충북의 정서와 맞아 떨어졌다”고 풀이했다.

A씨는 강자보다 약자에게 쏠리는 충북정서의 또 다른 예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직후 치러진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충북의 8석을 싹쓸이한 것을 꼽았다. A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 내내 국정지지도가 높지 않았다. 그러다 노무현 서거 정국에서는 기적 같은 추모의 물결을 이뤘다. 그게 바로 충북의 정서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를 계승한 참여정부의 뒤끝은 좋지 않았다. A씨는 경기침체와 그 책임이 야당과 언론에 의해 정부에 전가된 것을 그 원인으로 꼽았다. 여기에다 2007년 대선보다 이듬해 총선에 더 관심이 있는 일부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선도 탈당하는 등 대통령과 거리를 두려한 것도 중요한 패인이 됐다는 것이다. A씨는 “당시 충북의 국회의원 대부분이 반노(反盧), 비노(非盧)였다. 대통령만 배제하면 자기는 사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는 바람을 향해 모래를 뿌리는 격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열린우리당이 분열과 통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탄생한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후보는 그해 대선에서 48.67%를 득표한 이명박 후보와 무려 23%에 가까운 차이를 보이며 26.14%를 얻는데 그쳤다. 충북에서는 그나마 17.79%의 차이를 보였다.

또 다른 소식통 B씨는 충북인의 기질 등을 거론하는 감정적 분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1990년대 중반까지 김대중에 대한 강력한 레드콤플렉스가 존재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B씨는 “김영삼은 결국 자신이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투쟁의 대상으로 삼았던 신군부와 야합해 민자당에 가세함으로써 대통령이 됐다. 김대중도 결국 이른바 ‘DJP연대’로 불리는 김대중·김종필·박태준의 연정으로 정권을 잡았다. JP와 손을 잡았다는 것은 지역감정에 편승해 충청지역의 표를 가져온 측면도 있지만 JP가 보수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레드콤플렉스를 무너뜨린 측면이 더 크다”고 설명했다.

김종필과 연대하니 충북 의심 풀어

그동안 김대중에 대한 충북의 기피는 그의 자질과 능력에 대한 불신보다는 오로지 이념과 성향에 대한 공포에 가까웠는데 김종필과 연대를 하는 순간, 이 같은 레드콤플렉스가 일거에 제거됐다는 것이다.

B씨는 노무현 지지에 대해서도 비슷한 척도를 들이댔다. “국민의 정부 5년 동안 북에 대해 햇볕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일각에서 퍼주기 논란 등 더욱 극렬한 반공이데올로기가 형성되기도 했지만 그 영역은 축소됐다. 남북교류는 전반적으로 남북관계에서 안전판 역할을 했고 국민들도 전쟁의 위험이 현저하게 줄어들었다고 판단했다. 노무현 정부의 탄생은 색깔론으로부터 해방이라는 토대 위에서 출발했고 새로운 정치에 대한 갈망을 반영한 것이었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B씨는 2007년 이명박 후보의 압승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B씨는 “한나라당은 국민의 정부·참여정부의 집권기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까지 표현했다. 그만큼 정권탈환을 위해 절치부심했다는 얘기다. 특히 보수언론이 독한 마음을 품고 달려들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 등 사정기관, 국정원 등 정보기관을 장악하지 않은 것은 물론 대다수 언론과도 대립했다. 보수는 총결집했는데, 여당은 분열됐다. 그래도 생각보다 표 차가 컸다”고 털어놓았다.

한나라당 집권 4년여가 지난 정국의 흐름은 4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박근혜 비대위 체제의 여당이 대통령과 최대한 거리를 두려한다는 점에서 꼭 그렇다. 다소 다른 점은 범야권이 통합이든 후보전술이든 여당과 1대1 구도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4월 총선에서는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부분적으로 후보전술을 구사하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각개약진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연말 대선에서는 연정을 염두에 둔 후보전술이 유력하고, 최소한 한나라당의 재집권을 막아야한다는 차원에서 진보정당이 후보를 내지 않는 소극적인 협조라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총선결과, 대선에 다양한 영향

결정적으로 대선 이듬해 총선이 실시된 지난 선거와 달리 이번에는 총선에 이어 대선정국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총선 결과가 대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다. 총선의 가장 큰 변수는 서울이다. 지난 총선에서는 서울지역 48개 선거구 가운데 한나라당이 무려 36곳을 석권했으나 이번에는 전세가 뒤집힐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문재인, 문성근, 김정길 등 3인방이 출사표를 던진 부산의 선거결과도 영남의 선거판을 흔드는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어찌 됐든 여야 모두 ‘한나라당이 18대에서 확보한 의석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른 것은 분명하다.

총선결과가 대선에 작용할 수 있는 경우의 수 역시 다양하다. 한나라당이 적당히 선방할 경우 일단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주가가 올라갈 수 있다. 만약 한나라당이 참패할 경우에는 그렇지 않아도 비대위의 인적구성에 불만이 많은 ‘친이의 반격’이 불 보듯 뻔하고 ‘적전분열’은 걷잡을 수 없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에 반해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할 경우 오히려 대선에서 견제심리가 작용할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들도 있다.

또 충북은 고 육영수 여사의 고향이고 박근혜 위원장이 당대표시절 고속철도 오송분기역 등을 당론수준으로 결정하는 등 공을 들여왔다는 점에서 앞서 A씨가 주장했던 류(類)의 ‘동정하는 충북기질’이 작용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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