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재의 발자취 따라 대련에서 북경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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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의 발자취 따라 대련에서 북경까지
  • 신용철
  • 승인 2011.12.28 17: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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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과 함께하는 단재해외유적답사 동행취재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 학생 13명 성인 10명 답사단 꾸려

우리 고장을 대표할 수 있는 위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단재 신채호 선생(1880~1936). 그는 한일병탄으로 나라가 기울 때, 지식인으로서 친일에 야합하지 않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 그곳에서 언론인이자 역사학자, 독립운동가로 커다란 족적을 남기며 꼿꼿한 삶을 살았던 우리 민족의 자존심이요, 자랑스런 선각자다.

이런 그를 기억하고자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는 '5회 단재역사퀴즈대회', '2회 단재청소년글짓기대회' 입상자들과 희망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지난 17일부터 22일까지 5박 6일 동안 '제 2회 청소년과 함께 하는 단재해외유적답사'를 진행했다.

이번 답사는 국가보훈처, 충청북도, 충청북도교육청, 청주시, 청원군 후원으로 이뤄졌으며 학생 13명 성인 10명 총 23명이 답사단을 꾸렸다.

▲ 대련공항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단재해외유적답사단 일행.

가슴에는 단재라는 공통분모를 안고

17일 토요일 새벽 5시 청주체육관 앞. 답사단 일행들이 하나둘씩 가슴에 설렘을 안고 버스에 오르기 시작했다. 원종문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 위원장의 짧은 인사말이 끝나고,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답사단 일행은 마침 당일 아침 공항 시스템 장애로 비행이 지연돼 다롄(대련)에 한 시간 연착했다.

한 시간을 더 기다리면서도 답사단 일행은 연방 싱글벙글이었다. 서로 얼굴도 잘 모르는 어색한 사이였지만, 오직 단재에 대한 관심으로 만난 공통분모 때문인지 벌써부터 하나 둘씩 친근해지기 시작했고, 눈빛에는 단재해외유적답사를 하며 보고 느끼고 배워오겠다는 각오마저 비쳐졌다.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한 시간 여 만에 11시 30분(한국시간 12시 30분)께 다롄공항에 도착했다. 답사단 일행은 곧바로 뤼순감옥(여순감옥)으로 향했다. 이곳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1910년 3월 26일 처형된 곳이며, 그로부터 26년 후인 1936년 2월 21일 단재 선생이 옥사한 곳이다. 

단재 선생이 감옥살이를 했던 감방 앞에서 이번 답사단 단장을 맡은 단재연구가 박정규 전 청주대 교수의 인도로 답사단 일행은 단재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기리며 묵념을 했다. 박 단장은 “이곳에서 단재 선생은 민족주의자에서 무정부주의자로 바뀌었다”면서 “단재 선생은 매일 책을 읽고 '민족전선을 위하여', '혁명 동포에게' 등을 이곳에서 썼다”고 설명했다.

좁은 감옥 안, 차가운 바닥에서 8~10명이 함께 지냈다는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답사단 일행은 나라를 위해 일하다 고초를 겪은 단재 선생을 생각하며 이내 숙연해졌다. 안중근 의사가 교수형에 처해진 곳을 둘러보면서도 모두가 말문을 닫은 채, 각자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했다.

일행은 뤼순감옥에서 2시간여의 관람을 마치고 단재 선생 화장터로 추정되는 곳을 둘러본 뒤, 전용버스로 약 4시간에 걸쳐 단동으로 이동했다. 이날 저녁, 단동에 도착하자마자 일행은 백두산에서 발원해 장백, 집안, 단동을 경유해 황해로 들어가는 총길이 795Km인, 민족의 강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중국과 북녘의 양쪽 국경인 압록강을 목도 할 수 있었다.   

▲ 단재 신채호 선생이 옥사한 여순 감옥 앞에서 답사단 일행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민족주의자에서 무정부주의자로

이튿날 아침 식사 후, 일행은 압록강유람선에 탑승했다. 바로 눈앞에 북녘 건물들과 북녘 사람들이 보이지만 그저 그들이 보건 그렇지 않건 손을 흔드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압록강을 바라보며 마천루 건물들이 가득 들어선 단동에 비해 상대적으로 너무 초라하기까지 보였던 북녘을 보며 일행들 몇몇은 표현하기 힘든 깊은 상념에 젖어 있는 듯 보였다.

이어 일행은 5시 30분 가량에 걸쳐 고구려 2번 째 수도였던 집안으로 이동했다. 광개토대왕릉 및 광개토대왕비, 장수왕릉(장군총), 오회분오호묘 등을 보기 위해서였다. 단재 선생은 1914년 대종교 종사 윤세복의 초청으로 길림성 환인현에서 1년 동안 역사를 가르치며 고구려 유적지를 돌아 본 적이 있다.

이 때 그는 "집안현 고구려 유적을 한 번 보는 것이 김부식의 고려사를 만 번 읽은 것보다 더 낫다"고 표현했다 한다. 과연 백문이불여일견이었다. 일행들은 유적들을 둘러보며 웅혼한 우리 민족 고구려의 기상을 보며 단재 선생이 왜 그렇게 표현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일행은 백두산 천지를 가기 위해 통화로 이동해 그날 일정을 마무리했다.

19일 아침 식사를 끝내고, 일행은 다시 4시간 30분 정도를 달려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백두산 전체 면적 중 3분의 2가 북녘 영토이건만 일행은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쪽에서 백두산 천지를 오를 예정이었다.

마침 이날 일행은 백두산 천지를 오르기에 앞서 점심 식사를 하며 김정일 사망 소식을 듣기도 했다. 모두들 백두산 천지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들 떠 있었지만, 눈이 적어서 스노우모빌을 천지까지 이동 할 수 없다는 현지 가이드의 설명에 아쉬움을 남긴 채 포기해야 했다. 그저 맛보기(?)로 백두산에서 스노우모빌로 갈 수 있는 곳까지 스노우모빌 타는 것으로 어쩔 수 없이 만족해야 했다.

대신 일행은 천지가 용암을 분출 할 때 만들어진 V 모양의 협곡으로 기묘한 형태로 이루어진 금강대협곡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여유를 즐겼다. 기묘한 형태의 송곳바위와 천길 낭떠러지 사이로 흐르는 계곡수를 보며 모두들 그 절경에 감탄하기도 했다. 이후 일행은 작은 시골 동네인 송강하에서 하루를 묶었다.

▲ 단동에서 답사단 일행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뒤로 보이는 압록강 철교를 건너가면 바로 북녘에 닿을 수 있다.

'조선족'은 조선인 폄하하는 말

답사 4일 째인 20일 아침, 일행은 3시간 30분에 걸쳐 다시 통화로 향했다. 항일전쟁 영웅 양정우 능원과 동북항일기념관(현재 정우능원)을 답사하기 위해서였다. 통화시 중심부에 위치한 양정우 능원은 동북항일연군 1군 양정우군단장의 묘다.

임금이나 황제의 묘에 쓰이는 능(陵)이 붙은 이곳에는 양정우가 이끌던 1군 1사단장인 이홍광을 비롯해 이춘열, 이동광, 김정길, 김순회 등 우리 민족 독립운동가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어 동북항일운동에서 그 위상을 증명하고 있었다. 또 조직도에서 2군 3사단장으로 김일성이 기록되어 있어 주목이 되기도 했다.

이후 일행은 다시 또 4시간에 걸쳐 후금의 수도였던 심양에 도착했다. 심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답사단 일행은 이번에는 북경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심양에서 멀리 북경까지 가는 거리의 시간을 아끼기 위해 심야열차를 택한 것이다.

열차 내 4인 1실로 20일 21시 25분에 심양에서 출발한 열차는 10시간 가량 걸쳐 21일 오전 7시 30분께 북경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북경까지 가는 동안 답사단 학생들은 그동안 사이가 가까워져 새벽 3시까지 웃음꽃을 피워가며 대화를 이어가기도 했다.

북경에서 만난 아버지 국적이 한국 국적인 현지 가이드는 "조선족이라는 명칭은 일본인들이 중국 내에 있는 조선인들을 폄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명칭"이라며 "재미교포, 재일교포는 있지만 재중동포는 없다.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며 답사단 일행들에게 깊은 화두를 던지기도 했다.

일행들은 이날 현지 가이드의 안내로 진시황제가 북방의 흉노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만든 건축물로 중국인의 오랜 역사와 문화적 우수성을 과시하고 있는 만리장성을 관람했다. 이후 일행은 단재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진스팡지에, 챠오떠우후퉁, 따헤이후후퉁과, 북경대, 고루 등을 답사했다.

진스팡지에로 가는 길에 잠시 만난 단재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 여사는 "시아버님이 어쩔 때는 공산주의자로 몰려 부당치 않은 대우도 많이 받았다"면서 "그때는 정말 억울하고 원통했지만 여러분들처럼 많은 분들이 시아버님을 제대로 바르게 평가 할 줄 믿는다"고 말했다.

이어 이 여사는 혹시 단재 선생의 유품이 있냐는 한 학생의 질문에 “당시 식민지 속국 상태라 유품 맡기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시아버님께서 천진에 사는 박용만이라는 사람에게 당신의 작품을 맡겼는데, 그 뒤 그 사람이 죽고 북조선 대사관이 한 뭉치 다 가져갔다고 한다. 그 뒤로 소식이 끊겼다”고 말해 안타까움을 더했다.
 
단재 선생이 처음 북경에 도착해 이회영 가족이 살고 있던 곳에 정착했던 진스팡지에,  그가 이회영 선생 부인 이은숙 여사의 중매로 박자혜 여사와 결혼해 2년간 짧지만 행복했던 신혼생활을 보낸 챠오떠우후퉁, 극심한 생활고로 아내와 장남 수범씨를 환국시키고 홀로 남아 역사 연구와 중국 월간지 ‘천고’를 집필했던 따헤이후후퉁.

이곳들은 이제 중국이 베이징 올림픽을 개최하고 이후에 여러 개발들로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답사단 일행은 그저 게딱지처럼 납작한 집들이 처마를 서로 맞대고 옴밀좀밀하게 살아갔던 그 옛날을 생각하며, 빈한한 삶 속에서도 절개를 잃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찾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던 단재 선생을 그릴 뿐이다.

▲ 장수왕릉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답사단.

“역사 교훈 외면한 민족은 소멸”

‘2회 단재청소년글짓기대회’에서 중학생 부문 1등으로 이번 답사에 합류한 조우인 학생(대구 오성중 3)은 “평소 역사와 글짓기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단재청소년글짓기 대회를 알게 됐다”며 “이번 답사가 잊지 못할 일로 남을 것 같다. 단재 선생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살아 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성한 학생(상당고 1)은 “친구 아버지가 단재문화예술제전추진위원회에 관계된 분이라 얼떨결에 따라왔는데, 그동안 단재 선생님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다가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면서 “과학 쪽에 관심이 많은데, 과학자가 되기 전에 먼저 우리 민족의 역사를 바로 아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친구를 설득해서 함께 자발적으로 이번 답사에 합류한 유진영 학생(산남고 2)도 “비록 퀴즈대회에서 떨어졌지만 단재 선생님의 유적지를 꼭 보고 싶었다. 그래서 부모님께 말씀 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며 “그 분이 보고 느낀 것을 나도 보고 느낀 것이 참 많은 의미로 다가온다. 단재 선생님의 얼을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번 ‘단재해외유적답사’를 통해 답사단은 단재 선생의 흔적들을 추적하며 깊은 울림을 안고 돌아왔다. 구한말, 나라를 잃은 설움에 해외에서 직접 행동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고자 수 십 년을 살며 비분강개했던 한 지식인이자 선각자를 만날 수 있었다.

교통도 불편하고 환경도 좋지 못했던 그 당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무던히도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투쟁했던 한 독립운동가를 만날 수 있었다. 일제의 통치가 조국의 근대화에 이바지 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역사에 대해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는 민족과 국가는 소멸할 것이다”라고 말한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지적은 여전히 많은 생각들을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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