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추스르는 양병산 후미진 기슭/ 민묘 한기(基) 삭풍을 마른 꽃대로 연주하고/ 풀벌레 쇠 소리 울음 줄 칼질로 날이 선다/ 용마루 봉황새가 연꽃 물고 나는 아침/ 추녀 끝은 하늘 찔러 감청색 걷어내고/ 선조의 활자의 피는 얼 빈 벌판을 다 재운다/ 대중삼년(大中三年) 네 글자에 깨어나는 역사의 명(銘)/ 서까래 단청 빛이 거미줄 밀어붙이면/ 되찾은 연화대의 미소 고요 바람 몰고 온다(흥덕사 율)”

지난 85~86년, 청주시 운천동 흥덕사지를 청주대박물관이 발굴조사할 때 현장 취재기자로 뛰면서 느낀 감흥을 훗날 시조로 정리해본 것이다.

개발의 논리가 보존의 논리를 앞질러가던 당시의 상황은 너무도 안타까웠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를 인쇄한 절터가 이토록 무참히 파괴될 수 있을까. 이 반문명적 행위 앞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허기사 이 절터가 발굴이전에는 ‘직지’를 인쇄한 곳 인줄 그 누구도 몰랐으니까 말이다.

일반적으로 이 절터는 택지개발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줄 알고 있으나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1984년 청주대박물관 박상일 학예사에 의해 이미 절터가 확인되었다. 그때는 어떤 절터인줄 몰라 마을 이름을 따서 ‘연당리사지’라 불렀다.

청주대의 발굴요청을 접수받은 충북도는 택지개발 중인 절터 일대에 대한 현장보존조치를 내렸음에도 공사현장에서 전달이 잘 안 돼 절터의 절반이 깎여 나간 것이다. 중문은 물론 탑지, 동회랑, 금당(金堂)의 절반, 금당 뒤편으로 있는 강당지의 일부가 개발의 삽질에 없어졌다. 

그나마 절터의 절반 절도를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절터 위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민묘(民墓) 1기 덕분이었다. 문화재법은 잘 몰라도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은 관련법에 위반된다는 사실을 현장 인부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리하여 산 자는 절터를 깎아 먹고 죽은 자는 절터를 지켰으니 역사와 개발 사이의 아이러니가 아니고 무엇이랴. 흥덕사지 보존의 1등 공신은 산 자가 아니라 무덤의 주인공이었으니 문득 삼국지가 생각난다.

제갈량(諸葛亮)은 유언을 통해 ‘자기의 형상을 나무로 깎아 수레에 싣고 적진 앞에 끌고 다니라’고 하였다. 촉나라를 치던 사마중달(司馬仲達)은 제갈량이 죽을 줄 알았다가 수레를 보고 기겁을 하여 도망을 친다. 이 고사에서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을 쫓았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지만 공교롭게도 흥덕사지에서 그 회전의 법칙을 나타낸 것이다. 만일 무덤이 없었더라면 흥덕사지는 통째로 멸실되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태어난, 금속활자로 만든 ‘직지’는 어느새 청주 역사의 정체성(正體性)을 결정짓는 간판스타가 되어 있다. 직지 세계화 사업이 강도높게 추진되고 있다. 이에비해 직지를 낳은 흥덕사지는 별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율곡이 훌륭하면 이율곡을 낳은 신사임당이 있는 법이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다. 직지가 지식정보의 대중화 장을 연 소프트 웨어라면 흥덕사지는 하드 웨어다. 그러기에 흥덕사지 중창(重創)의 당위성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중창하지 않은 고찰이 거의 없다. 통일신라 때의 대중삼년(849년) 흥덕사지 출토기와만 봐도 그렇다. 수덕사 대웅전,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등 고려시대의 건물을 모델 삼아 없어진 직지 모태를 복원하는 작업은 너무도 당연하다. (언론인,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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