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하 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연구실장···“한국이 IT 강국인 이유 직지와 연관 있어”

▲ 황정하 학예연구실장

그대는 직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청주시민들은 직지에 대해 귀가 따갑도록 듣고 있다. 하지만 막상 알고 있는 내용이 뭐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저 현존하는 세계 最古의 금속활자본 정도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직지는 이런 역사적 사실 외에 무궁무진한 얘깃거리들을 갖고 있다. ‘청주인문학교실’에서 우리지역 문화 바로알기 코너로 ‘찬란한 문화유산 직지, 그 직지에 담긴 의미와 뒷이야기’를 강의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황정하 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직지는 우리 민족이 금속활자 발명국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위대한 증거물이다. 직지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당시 고려시대가 금속활자를 만들어 쓸 만큼 문화적으로 높은 수준에 올랐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고려시대는 이자겸의 난, 묘청의 난, 정중부의 난, 무신란 등 내·외란을 겪으며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최씨 무신들의 힘을 빌어 정권을 잡은 뒤 문신의 힘이 필요하자 이규보를 등용한다. 이규보의 ‘상정예문’, 최이의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금속활자로 인쇄 됐고 이후 직지가 간행됐다”고 말했다.

목판인쇄는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 금속활자로 전환한 것인데, 이는 문화적으로 상당히 앞섰다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실제 이 대목에서 한국인은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황 실장은 이어 “활자는 책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다. 즉 지식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소수 귀족들만 교육을 받았다. 이 때 다품종 소량의 책이 필요했다. 이런 책을 찍으려면 목판보다는 금속활자본이 훨씬 경제적이고 효율적이다”고 강조했다. 필요는 발명을 낳았다는 얘기다.

참고로 ‘라이프’誌는 지난 98년 “독일의 구텐베르크 업적을 찬양하는데 있어, 그가 하지 않은 일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활자를 발명하지도 않았고, 금속활자를 발명한 것도 아니다. 금속활자는 14세기에 한국인이 발명했다”고 전했다. 직지 간행(1377년)이 구텐베르크의 ‘42행성서’(1453~1455년)보다 최소 76년 앞섰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다만 두 가지 출판물이 이 세계에 끼친 영향은 다르다. 황 실장은 구텐베르크 성경은 르네상스를 거쳐 종교개혁-시민혁명-과학혁명-산업혁명-자본주의를 불러왔다고 정리했다.

“하이닉스반도체는 청주에 있어야 한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했던 시기에 대학들이 많이 생겼고 인쇄소가 번성했다. 시민들은 구텐베르크가 찍은 성서를 많이 보았고, 이것이 종교개혁을 불러왔다. 교회에서 면죄부를 파는 등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시민혁명, 과학혁명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산업에 응용되면서 산업혁명을 불러왔다. 여기서 대량생산으로 인한 물건들이 남아 돌자 매매가 이뤄졌고 자연스레 자본주의·민주주의가 싹텄다.”

그러나 직지는 한자로 된데다 내용이 어려워 일반 백성들에게 전파되지 못했다. 당시는 귀족들만 교육을 받았다. 이 때문에 구텐베르크 성서 만큼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는 게 여러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아쉽기는 하지만 그러나 지난 1000년 동안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 금속활자라는 사실에 우리는 다시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는 여기서 금속활자 인쇄의 세계사적 의미를 되짚었다. 중국은 필승이라는 사람이 ‘교니활자’를 만들어 활자인쇄의 원리를 발견했고, 한국은 1200년대 이규보의 ‘상정예문’ 등으로 활자인쇄의 실용화에 성공했다는 것. 그리고 독일 구텐베르크 42행 성서는 활자인쇄의 보편화에 기여했다는 얘기다. 직지는 석찬·달잠이라는 승려에 의해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됐고 비구니 묘덕이 재정지원을 했다.

황 실장은 “직지의 본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다. 백운은 스님의 호, 화상은 스님이라는 의미, 초록은 요점정리, 불은 부처, 조는 조사스님(큰스님)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직지는 가리킨다, 심체는 마음의 본체, 요절은 중요한 구절을 말한다. 다시 말해 직지는 마음의 본체가 되는 중요한 대목들을 편저한 것이다. 직지의 핵심사상은 無心이고 팔만대장경의 핵심만 뽑은 게 직지”라고 설명했다.

직지는 프랑스 초대 공사였던 꼴랭 드 플랑시가 1896~1900년에 본국으로 돌아갈 때 가져갔고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한국관에 전시되면서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진다. 이 때 고종은 플랑시의 공로를 인정해 태극훈장을 수여했다고 한다. 이후 직지는 경매시장에 나와 앙리 베베르라는 보석상이자 예술품 수집가에게 팔린다. 베베르는 세상을 떠나면서 손자에게 직지를 파리 국립도서관에 기증할 것을 유언으로 남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황 실장은 “중국이 우리나라를 부러워하는 세 가지가 있다. 가장 오래된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가장 완벽한 대장경인 팔만대장경, 현존하는 最古 금속활자본인 직지”라면서 “직지는 우리나라가 IT강국인 이유를 설명하는 하나의 증거물이다. 하이닉스반도체가 청주에 있어야 하는 이유도 있다”고 말했다. 

황정하 학예연구실장은 누구?
91년 고인쇄박물관 ‘개관 멤버’, 직지 전문가로 통해

황정하 청주고인쇄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직지 전문가로 통한다. 청주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한 뒤 청주대박물관에 몸 담았다가 91년 학예직으로 공직에 들어섰다. 고인쇄박물관이 91년 개관한 것을 감안하면 ‘개관 멤버’다. 이후 청주시에 4년간 근무한 것을 빼고는 줄곧 고인쇄박물관을 지켰다. 청주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문학석사, 중앙대 대학원 과학과에서 이학박사를 받았다.

황 실장은 그동안 ‘백운직지심체 간행고’ ‘백운직지심체 간행 배경’ ‘고려시대 금속활자의 발명과 직지활자 주조방법’ ‘동서양의 활자 인쇄술의 시원’ ‘고려시대 직지활자 주조법의 실험적 연구’ ‘개화기의 인쇄출판문화와 텬로력뎡’ 등의 연구논문을 썼다. 현재 서원대에서 직지를 강의하고 각급 학교에서도 직지수업을 하고 있다. 직지를 알리는 일이면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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