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평론가 고미숙 “요즘 청소년 SNS 기술만, 사람은 만나 우정나눠야”

고전평론가 고미숙

‘통즉불통 불통즉통 (通卽不痛 不通卽痛)’.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않으면 아프다. 허준의 ‘동의보감’에 나오는 말이다. 지난 10일 청주인문학교실 강사로 나온 고전평론가 고미숙 씨는 ‘인문학과 삶: 고전, 인물들의 향연’을 주제로 한 강의에서 통하라고 외쳤다. 소통하라는 얘기다. 소통을 안하면 병이 안으로 파고 들어가 우울증과 암이 생긴다는 것이다.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은 누구를 만나도 친구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유머가 넘쳤다. 중국어를 모르면서도 중국에 가서 필담으로 친구를 사귀었다. 중국 장사꾼들은 연암의 박학과 인품에 매료됐다. 이런 우정을 통해 나온 게 ‘열하일기’다. 이 책은 이질적인 대상들과의 뜨거운 접속의 과정이고, 침묵하고 있던 말과 사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발굴의 현장이다. 그리고 담론들이 범람하는 생성의 장이다.”

연암은 노론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일찌감치 과거를 포기하고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살았다. 18세기 지식인으로 유명했던 홍대용·박제가·이덕무 등이 ‘연암그룹’의 멤버들 이었다. 고 씨는 길 위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친구가 된 연암을 “길 위에서 사유하고, 사유하면서 길을 떠나는 노마드(유목민)”라고 표현했다. 아울러 벽초 홍명의 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꺽정이와 유복이, 봉학이, 배돌석, 천왕동이는 가난하고 밑바닥 출신들이지만 길 위에서 배우고 우정을 나누는 모습이 특별하다는 것. 그래서 신분을 떠나 모든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며 유쾌하게 한 시대를 풍미한 연암과 꺽정이를 배우라는 게 고 씨가 하고 싶은 말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요즘 청소년들을 걱정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지금 10대들은 머리와 몸을 쓰지 않고 손가락으로 스마트폰 검색하는 기술만 익힌다. 이들에게는 우정의 파토스가 없다. SNS는 우정을 쌓는 게 아니다. 피드백이 없고 진정한 소통의 장을 마련해주지 않는다. 사람은 만나야 한다. 시스템이 좋으면 사람이 필요없는데, 현대사회가 꼭 그렇다. 문명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모두 끊어놓고 있다.”

연암과 임꺽정은 집에서 나와 길 위에서 사랑하고 우정을 나누지만 요즘 청년들은 패기가 없어 못내 걱정된다는 것. 지성과 야성이 공존하는 곳이 대학이건만 대학에서 이런 것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 ‘취업, 돈, 성공’에 목매는 대학생들에게 이런 낭만과 배짱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죽을 고비를 겪어가며 압록강을 건너 중국 연경으로, 연경에서 열하로, 다시 열하에서 연경으로 총 3000리가 넘는 여정을 경험한 연암의 패기, 그 과정에서 사유하고 깊은 통찰력으로 ‘열하일기’를 완성한 지적 호기심이 부럽다.

고 씨는 또 인복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무리 많이 배웠어도 인복이 없으면 불행하다는 것이다. 지식공동체 ‘수유+너머’를 운영해본 사람답게 사람이 중요함을 거듭 확인시켰다. “지식공동체에서는 세대차이가 없다. 학교 밖 공부는 여러 세대가 함께 하는 게 좋다. 서로를 통해 배운다. 10대 청소년은 50대 어른을 통해 미래의 나를 그려보고, 어른은 청소년에게서 새로운 것을 배운다.” 그러나 ‘지식 소비자’는 되지 말라고 말했다. 여기저기 강좌를 찾아다니며 지식을 쌓지만, 거기서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끝내는 게 소비자이고, 이를 나누고 확대하는 것이 생산자라는 것이다. 지식의 생산 주체가 되라는 얘기다.

그는 허준의 동의보감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해석을 내놓았다. 허준은 69세의 나이에 머나먼 의주로 유배를 갔으나 이 기간에 동의보감 전체 절반을 완성했다며 자기구원으로서의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고난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한 게 아니고, 공부가 있었기에 고난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동의보감이 완성되기까지 무려 14년이나 걸렸지만, 이공부를 통해 거듭났다는 것. 고미숙 씨가 남긴 말. “지금부터 모여 공부하면 즐거운 일이 생긴다.”

고미숙은 누구?  
지식공동체 ‘수유+너머’ 탄생 주인공
지금은 ‘감이당’운영, 고전 재해석 저서 다수

연구공간 ‘수유+너머’에 두 번 간 적 있다. 청주에는 없는 지식공동체가 부러워 여름휴가 때 일부러 찾아갔다. 예상대로 앎에 대한 욕구가 넘쳤다. 이 곳은 고미숙 씨가 수유리에 만든 공부방이다. 그런데 시작은 이렇게 미약했으나 나중에는 창대해져 지식공동체로 이름을 날렸다. 처음에는 소수의 국문학자들이 모여 세미나를 열었지만 곧 사회과학자들이 합류하면서 풍성한 강좌와 운동, 놀이 등이 생겨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고 씨는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에서 “지식과 일상이 하나로 중첩되고, 일상이 다시 축제가 되는 실험이 이뤄지는 곳, 혁명과 구도가 일치하는 비전이 탐색되는 곳이다. 일단 배움의 즐거움에 동의하면 성별, 세대별, 학과별 경계들은 쉽게 극복할 수 있다. 이런 즐거움이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함께 모여 공부를 했더니 먹을거리와 놀거리가 생기더라”는 게 그의 지론이다. 현재는 ‘코뮤넷 수유너머’라는 이름으로 수유너머 문, 수유너머 N, 수유너머 R 등이 있다.

지금 고 씨는 ‘감이당’(www.kungfus.net)이라는 또 다른 지식공동체를 운영하고 있다. 수유+너머는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의학과 역학이 만난 의역학, 동의보감, 마음세미나, 인문학강좌 등을 열고 있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청소년 비전탐구 프로젝트, 감이당 대중지성, 6080세대 고전학교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만들었다.

고 씨는 많은 공부를 하면서 그 때 그 때 책을 내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벌써 여러 권을 펴냈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계몽의 수사학’ ‘열하일기 현대판 버전’ 등과 ·달인 시리즈 ‘돈의 달인 코뮤니타스’ ‘사랑과 연애의 달인 호모 에로스’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가 있다. 또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등이 있다. 고려대 국문과에서 고전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몇 권의 책을 낸 뒤 고전평론가라는 이름이 붙었다. ‘꿀꿀한’ 박사실업자에서 유쾌한 프리랜서가 됐다는 게 그의 말이다. 강의도 아주 재미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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