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 출신 충북도 3인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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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출신 충북도 3인 독립운동가
  • 신용철 기자
  • 승인 2011.08.19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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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 도지사 외 신팔균, 채찬 지역에선 잊혀진 인물

한일 강제병합 이듬해인 1911년 6월 10일, 우리나라 최초 항일 독립군 양성기관 신흥무관학교 전신 신흥강습소가 중국 지린성 유하현 삼원포에 세워졌다. 옥수수 창고에서 시작된 독립군 신화 신흥강습소는 이듬해 통화현 합니하로 이주해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1920년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할 때까지 무려 3500명에 이르는 독립투사를 배출한 일제강점기 최대 항일무장투쟁 기지로 평가받고 있다.

같은 서훈, 이광 도지사만 기억돼

1910년대 독립운동 및 독립군 기지 건설운동에서 일시적으로 존속하지 못한 다른 군사학교 또는 독립운동단체와는 다르게 1910년대 내내 지속적으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한 신흥무관학교. 3.1 운동 이후 크게 확대되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큰 족적을 남기며 지울 수 없는 주요한 위치에 서게 된 신흥무관학교가 올해로 설립 100주년을 맞았다.

▲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맡았던 신팔균.
민족문제연구소가 소개한 신흥무관학교를 성장시킨 주요인물과 졸업생 54명 가운데 충북지역 인물로는 이광(청주) 전 충북도지사, 신팔균(진천) 대한통의부 사령장 겸 총사령관, 채찬(충주) 대한통의부 중대장 등이 있다. 이 세 명의 충북지역 신흥무관학교 관련 독립운동가 가운데 임시정부 외무부북경주재외무위원, 해방 후 체신부 장관 등을 역임한 이광 전 충북도지사를 제외한 신팔균, 채찬 독립운동가는 조명을 받지 못해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국가보훈처가 지정한 훈격한 따르면 이들 셋 모두는 김구, 김규식 등이 받은 대한민국장에 이어 대통령장 다음으로 독립장에 똑같이 서훈되었다. 하지만 이광 전 충북도지사만 어느 정도 자료가 남아 기억되고 있을 뿐 신팔균, 채찬 등은 충북의 자랑스런 독립운동가 역사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충주시 "채찬 독립운동가, 처음 듣는 분"

<충청리뷰> 취재결과 각 지자체에서 생가 복원, 유족 관리 등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충주시의 경우는 채찬 독립운동가에 대해 공보담당, 문화체육과, 주민지원과 등이 서로 모른다며 책임 떠넘기기에 바빴다. 독립·국가유공자등을 총괄하는 주민지원과에서는 "처음 듣는 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조국의 독립을 꿈꾸며 훈련생들을 가르쳤던 신팔균과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강계주재소와 조선총독 사이토를 습격한 채찬. 하나 밖에 없는 자신들의 목숨을 오직 대한 독립운동에 바쳤던 그들을 추모하고 기리는 것은 후대 우리에게 숙제로 남아있다.

아래는 잊혀져 가고 있는 있는 것을 넘어 역사 기록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은 신팔균과 채찬을 민족문제연구소의 자료를 참조해 요약 소개한다.

신팔균은 1902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1907년 대한제국 육군 정위로 강계진위대에서 활약하다가 같은 해 7월 군대가 해산되자 낙향하여 후진육성에 진력하는 한편 1909년 대동청년단에 가입, 안희제, 이원식, 윤세복, 서상일, 김동삼 등과 함께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 남북만주, 북경, 상해, 서백리아 등을 전전하며 동지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8년에는 동삼성의 지도자로서 여준, 정안립, 박성태, 박찬익, 정신, 김동삼, 손일민, 김좌진, 서일 등 38인과 함께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에 참여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서 오광선, 이범석, 윤경천 등과 함께 독립군 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2년에는 의군부?광복단?광한단?흥업단등 대소 8개 단체가 합류하여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자 이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에는 그 사령관에 취임하여 양세봉, 문학빈, 심용준, 박응백 등과 함께 무장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 일본군의 사주를 받은 마적 300여명이 통의부사령부 소재지인 왕청문이도구를 습격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1924년 7월 부하들을 이도구 높은 산에 매복시킨 후 그들과 결전을 행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져 전사하였다. 그는 별호를 동천이라 하여 이청천, 김경천과 함께 독립군인제의 삼천(三天)으로 불리기도 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백광운으로 불리기도 한 채찬은 1905년 이강년을 따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조선이 강점당하자 남만지역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전공하였다. 졸업후에는 합니하 산골에서 백서농장을 만들고 둔전제로 군인을 양성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에는 서로군정서에 참가하여 모험대를 조직하고 국내에 진입하여 적기관을 파괴하고 적의 밀정을 처단하는데 주력하였다. 1920년 본부가 길림방면으로 이동한 후에는 신용관, 김유하 등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하여 제1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동년 5월에는 강계군 문옥면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동년 7월에는 이덕창을 시켜 친일파인 후창군수 권응규를 사살하게 하였다. 1921년에는 관전현에서 공격해오는 일경을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관전?집안?통화?임강?유하 등 각 현에 있는 친일기관인 일민단?보민회?강립단 수십개소를 습격하여 제거하였다. 또 의용단결사대 수백명을 조직하여 강계 어뢰면주재소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한편 1922년 김승학 등과 독립신문의 한문판을 발행하는 자금을 제공하였다. 또한 1922년에 대한통의부에 가담하여 제1중대장으로서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전덕원 등과 의견의 마찰로 통의부가 분열되자 남만의용군 대표로서 상해임시정부에 파견되어 교섭한 결과 김승학, 이유필, 이종혁, 차천리, 박응백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직할의 주만참의부를 설립하게 되었으며, 참의장 겸 제1중대장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4년 5월에는 이의준, 김창균에게 국경을 순시하던 제등실 총독을 저격하도록 지시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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